No. 1258 ]칼럼니스트[ 2006년 2월 25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딴글보기 | 거시기머시기 | 손님칼럼 | 배달신청 | columnist.org(홈)

딸 키우는 어머니 마음으로

임영숙 (서울신문 논설고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si

성범죄에 대한 우리사회의 태도는 매우 불합리하다.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 받고 고개 숙이며 가해자는 당당하다. 피해자만 죽어라 죽어라하는 식이다.

이 범죄는 피해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인격살인이다. 어린이 성폭력의 후유증은 더 심각하다. 피해 어린이의 영혼을 파괴해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할 경우 성에 대한 극도의 회피나 집착을 보이고 스스로 성범죄가 되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한다. 그 부모와 가족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엄청난 충격과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부부 이혼 등 가정이 파괴되는 사태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같은 끔찍한 범죄에 대한 우리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대처가 쉽게 바뀔 수 있을까.최근 서울 용산의 한 초등학생이 성범죄 전과를 지닌 이웃 가게 주인으로부터 성추행 당한 후 살해 유기된 사건이 발생하자 갖가지 재발 방지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화학적 거세에서부터 전자팔찌 제도 도입, 주거제한, 성범죄자임을 알리는 문패달기, 야간 통행금지, 처벌 및 신상공개 강화, 공소 시효 연장 또는 소멸 등.

그러나 전문가들은 제도개선도 필요하지만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 변화가 시급함을 일깨운다.“법과 제도 개선에 앞서 현행법이라도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말했다.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자와 함께 해 오면서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겪었으면 그런 발언을 했을까.

초대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지낸 강지원 변호사의 말은 더 뼈아프다. “재물을 빼앗은 강도죄에 대해선 집행유예 판결을 잘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을 파괴하는 성범죄에 대해선 돈 몇푼 주면 집행유예가 나는 관행이 있다. 남성 재판관들이 성범죄로 고통 받는 피해자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달달달 공부만 해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사법부 일원이 돼서, 불쌍한 이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감수성이 부족하다.”

이번 초등생 살해사건의 범인도 집행유예로 풀려나 두번째 성범죄를 저질렀다. 법정에 가기전 경찰 수사과정에서도 성범죄 피해자들은 잘못된 사회통념 때문에 큰 고통을 겪는다.“이럴줄 알았으면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피해자들은 후회한다. 성범죄 피해자의 90% 이상이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사건을 묻어버리는 이유다.

딸을 키우는 어머니 마음으로 성폭력 피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경찰이나 법관이나 다양한 제도개선책을 입안할 정부 당국자나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

미흡한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는 우리 사회의 그런 감수성 부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국민계도’ 차원의 범죄백서 수준으로 만들어져 고위험군 성범죄자의 형 확정 당시 이름과 나이, 시 군 구까지만의 주소, 직업 등만 6개월 공개되다가 만다. 오는 6월부터 시행될 이 제도의 개정안도 범죄 예방효과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두고 가해자 인권침해 논란이 벌어질 정도로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남성주의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딸 가진 부모라면 성범죄 전과자가 자기 집 주변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경찰도 이 정보를 등록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피살된 허양의 어머니는 호소했다. “내 아이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대책을 마련해 달라. 딸의 죽음이 씨앗이 되어 똑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바란다.”고.

- 서울신문 2006년 2월25일자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