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53 ]칼럼니스트[ 2006년 1월 25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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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해에 짚어보는 개 팔자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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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나오는 소설가 잭 니콜슨은 신랄한 독설로 다른 사람의 삶을 경멸하는 고약한 사람이다. 정신질환의 일종인 강박장애를 지니고 있다. 품성이 못되다 못해 옆집 강아지까지 아파트 쓰레기통에 쏟아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꼬여 그 강아지를 며칠 동안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인다. 억지춘향으로 개를 보살피다가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고 강아지가 돌아가자 그 괴짜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개가 못된 성격을 잡아주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개의 실명이 출연자 대열에 당당하게 나오며 얼굴만 잠깐 비췄던 조연 개들 이름도 함께 떠오른다.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개가 출연한 영화는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다. '벤지' '베토벤' '래시' 등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웨이크 아일랜드, '프라우드 레벨' 등 수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친구이자 한 식구임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서양 여러 나라 개들은 일반가정에서 대체로 그런 대우를 받기 때문에 상팔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게 진정한 상팔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예전 우리 농촌의 개들은 먹을 것은 시원치 않았지만 목이 묶여 지내지는 않았다. 종일 동네 개들과 어울려 마을과 들판을 쏘다니고 심심하면 집에 돌아와 울타리 밑이나 댓돌에서 낮잠을 잤다. 동네 사람들을 다 알기 때문에 누구나 잘 따르고 어쩌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개들과 함께 마을이 떠나가도록 짖어댔다. 특정한 집의 개라기보다 동네의 한 식구였다. 사람들이 논밭에서 한창 바쁠 때도 그렇게 놀고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니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다.

그리 살다가 삼복이 되면 참변을 당한 개들이 있었지만 나이 든 개들은 대개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개가 나이가 많아 저 갈 데로 가느라 그랬다' '개를 너무 늙도록 기르면 집안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기는 법'이라는 등의 말로 서운함을 달랬다. 그래도 개를 묶어서 기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개를 놓아기를 수 없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도 묶어 기른다. 세상이  각박해지니 개들 심성도 사나워졌는지 풀어놓으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개 도둑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 도시를 중심으로 애완견 붐이 일어 서양 못지 않은 호사를 누리는 개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데 그게 과연 상팔자인가. 그렇다고 선뜻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천연의 옷인 털이 있는데 이를 비싼 돈 들여 다 밀어낸 뒤 옷을 입히고, 산천의 돌과 흙을 마음대로 밟고 다니기 좋도록 만들어진 발에 덧신을 신겨 가지고 다니면 그 개들이 과연 행복할까. 가끔 산보라고 나가지만 사실상 하루 종일 아파트 안에 갇혀 있거나 마당 한 구석에 밤낮 묶여 있는 개와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었던 예전 개 중 누가 더 상팔자인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하다. 짖는 소리 방지를 위해 성대수술까지 한 개들은 팔자 이전에 끔찍한 학대를  당한 것이다.

인간이나 개나 자유의지가 억압당하고 강요에 의해 본성이 훼손되면 그건 지옥이다. 인간사회의 도시화와 자연환경파괴는 개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의 생활을 계속 억압하고 학대해 왔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당장 자연환경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고, 개 등 동물들의 본성을 해치는 사육방식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인간의 친구로서 계속 함께 살아가는 다른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개 기르기에 대한 독일의 정책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주마다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개를 기르려면 당국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의 기준은 제때 밥 주는 것,  목욕, 산책 등 개를 위한 여러 가지 의무를 잘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에 두고 있다.

오늘날 여건이 개를 놓아기를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개의 본성을 조금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실현하도록 개의 주인자격을 강화한 것이다. 그걸 이행할 능력이 없으면 개를 아예 기르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그걸 그대로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 취지를 살려 우리에게 맞는 규정을 마련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 하다. 개를 기르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해서 주거지를 비롯한 여러 생활 공간을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또 독일처럼 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수칙들을 더욱 강화하고 주지시켜 정말 한 식구처럼 대하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현재 여건에서 개를 기르는 것은 세 살 이하의 아기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보다도 지진아 한 명을 돌보는 이상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예전처럼 놓아기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보호자의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개를 단순한 동물로 보지 않고 자기 식구로 여길 때만 가능하다.

'자전거 도둑' '해바라기' 등 명작을 남긴 이탈리아 영화감독 비토리아 데 시카의 작품 '움베르토 D'의 본래 의도는 삶과 모든 것에 지친 노인의 절망에 있지만 같이 사는 개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움베르토 도미니크  노인은 전직 공무원으로 로마의 허름한 동네 사글세방에서 개 플라이크와 둘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워낙 시원찮은 연금액이라 방세도 제대로 못내 거리로 쫓겨날 판이다.

개는커녕 자기도 굶어죽을 형편이어서 연금을 인상하라는 노인들 데모에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때도 개는 꼭 데리고 나간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구걸이라도 해볼까 하고 나갈 때도 같이 간다. 개에게 구걸을 시켜보려는 생각이 한 구석에 있기도 하지만, 빈방에 놓아두면 돌 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플라이크를 단순히 개로 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러나 노인은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분신으로 여기므로 급식소에 가서도 주인 몰래 플라이크 몫을 챙겨준다.

아무리 허덕여도 살기 힘들어 자살을 결심한 그가 개를 데리고 간 곳은 개 임시보관소. 자기의 남은 돈 전부와 모든 것을 주면서 개를 맡기려 하나, 함께 있을 개들이 험상궂게 생기고 주인이 오래 나타나지 않으면 보관소 나름대로 훈련을 시킨다는 말에 포기한다. 자기가 죽은 뒤 힘든 훈련을 받을 개가 안타까워 맡기지 못하고 둘이 무작정 떠난다.

어느 공원에서 개를 좋아하는 애한테 주려고 하나 개를 싫어하는 부모들이 완강하게 반대해 그 계획도 무산된다. 철없는 어린애를 누구에게 맡기고 이 세상을 떠나려는 어미가 그것마저 틀리자 절망에 빠지는 모습 그대로이다.

결국 개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달려오는 열차에 뛰어들 순간, 개가 질겁하고 달아난다. 자살에 실패한 노인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개를 부르나 노인을 믿지 못하게 된 개는 슬금슬금 피한다. 참담해진 노인이 슬픈 표정으로 계속 달래니 마침내 개의 마음도 움직여 둘은 화해의 포옹을 한 뒤, 애들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뛰어 간다. 사람과 개가 아니라 한 가족의 재회처럼 가슴이 뭉클한 장면이다.

처음에는 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시들해져 슬그머니 나가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나, 키우기는 하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이들로서는 그런 노인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서울 거리에 집나온 개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노인과 개가 생각난다.
움베르토 노인에게는 프라이크가 단순한 개가 아니라 자기 생의 반려자다. 그런 주인을 만난 개야말로 먹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고 고달프게 살아가지만 상팔자를 누린다고 자부할 만 하다.

우리는 개를 기를 수 있는 여건이 그리 좋지 못하다. 도시가 더 심하다. 개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서양처럼 고르지 않다. 그럼에도 개를 기르려는 사람들은 움베르토 노인 정도는 못되더라도 거기에 버금가는 사랑과 보호자로서의 책임 그리고 의무감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건 돈만 많이 들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럴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아쉽더라도 개 기르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미래에셋라이프' 1월호(200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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