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34 ]칼럼니스트[ 2005년 11월 2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글보기 | 거시기머시기 | 손님칼럼 | 배달신청 | columnist.org(홈) |

'빅브라더상'이 필요 없는 날을 기다리며

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netporter


'빅브라더(Big Brother)'는 사회학적 통찰과 풍자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1903∼1950)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존재'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빅브라더는 이 소설에서 독재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한편, 정치체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하여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48년에 출간되었을 당시만 해도 빅브라더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바람에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제목대로 1984년을 전후하여 새롭게 조명되면서 사회체제가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감시사회 체제로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자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혜안에 놀라게 되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이행되어 가면서 '소설 속의 빅 브라더'가 '현실 속의 감시체제'와 흡사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은 구미 선진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산업사회의 껍질을 벗고 정보화사회를 지향하는 초기단계였다. 개인정보에 대한 감시와 유출문제가 점차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정보화가 깊이 진전될 경우 언젠가는 조지 오웰이 말하는 빅브라더가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에 이르렀다.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엘빈 토플러나 존 나이스비트 같은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래정보화사회는 화사한 장밋빛이 아니라 암울한 잿빛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송두리째 말살될 것이라는 전망도 서슴지 않았다.

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과 렉 휘태커 교수는 1999년에 쓴 저서《개인의 죽음(The End of Privacy)》에서 "새로운 정보기술의 도입은 독재자(Big Brother)의 전횡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낳았으나 역설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은 독재자의 역할이 또다시 요구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총 3권으로 된 《그림자 정부》의 저자 이리유카바 최는 미래의 사회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는 두 번 째 책인 「미래사회」편에서 노골적으로 강대국에 의한 인간지배의 음모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야 그 실체가 드러난 에셜론이 대표적인 예로 들면서 '그림자 정부'가 각종 전자무기로 인간의 몸과 마음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단정하기까지 한다. 그가 말하는 '그림자 정부'는 한층 발전된 '빅 브라더'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20여개 나라에서 해마다 '빅브라더상'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 정부나 기업이 첨단 정보통신기술로 국민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지를 시민의 눈으로 감시하기 위해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이다. 1998년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라이버시 인터내셔널'이 처음으로 이 상을 제정했다.

지난 11일 국내 8개의 인권시민단체가 발족시킨 '2005 빅브라더상 조직위원회'가 개인과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하는는 '2005 빅브라더상'의 부문별 수상자가 그제 발표되었다. '빅브라더상' 시상식이 열린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필자는 그동안 27개 후보 가운데 과연 누가 수상자가 될 것인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면서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날 발표된 3개 부문의 수상자를 보면 '가장 끔찍한 프로젝트상'은 정부의 주민등록번호제도, '가장 가증스러운 정부상'은 정보통신부, '가장 탐욕스러운 기업상'은 삼성SDI가 각각 수상했다. 특별상인 '내 귀의 도청장치상'은 최근 도청파문의 중심지인 국가정보원, 네티즌 투표로 결정되는 '네티즌 인기상'은 검찰과 경찰의 강력범죄자 유전자 데이터베이스 구축계획에 주어졌다.

주민등록번호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전국민의 식별번호로 각종 개인정보가 노출되어 도용 등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며 번호조합이 생년월일, 출신지역, 성별을 드러내 국가의 통제 및 사회적 차별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또 정보통신부는 개인정보보호기관을 자처하면서 인터넷실명제를 추진하고 지문정보를 수집하는 등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SDI는 2003년부터 직원의 휴대전화를 위치를 추적하는 등 직원감시행위를 한 것이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이다.

지금 세계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설정한 가상국가 '오세아니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각종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통제장치에 의해 일상생활을 감시당하고 있다. 지문이나 홍채 , 휴대전화, 전자태그 등을 통한 생체 및 위치정보의 수집과 이용이 증가하고 각종 전자카드의 사용과 폐쇄회로카메라(CCTV)에 의한 감시활동이 늘어나면서 이른바 '오웰식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위치정보나 전자태그를 이용하는 서비스는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흘려듣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기관이나 단체의 저의가 무엇인지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그저 일상생활을 좀 편하게 해준다는 '편의성' 때문에 개인정보를 아무에게나 제공하고, 범죄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전함'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프라이버시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빅브라더상을 수상한 주민등록번호제도, 정통부, 삼성SDI는 모두가 이 시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도이자 기관이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없다. 정통부는 그야말로 한국을 IT강국으로 만든 행정부처이다. 삼성SDI 또한 세계 정상의 디스플레이 기술을 바탕으로 첨단수준의 디지털 제품을 개발해 온 굴지의 기업이다.

그런 만큼 이들이 세운 공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말살시켜가면서 이루어 낸 성과나 업적은 결코 명예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수상자들에게는 '씻기 어려운 오명'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빅브라더상 수상자가 없어 상을 줄 수 없게 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민위원장이 시상식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대로 그런 날이 오기나 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 대상자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없어질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마저 버리고 싶지는 않다.

서울칼럼니스트모임 http://columnis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