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19 ]칼럼니스트[ 2005년 10월 1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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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라는 이름의 마취제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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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억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 우정, 의리, 낭만이라는 말들처럼 접하는 순간 괜히 목덜미에 뭔가 기어가는 것 같고 낯이 간지럽다. 남몰래 유치한 일을 저지르다 들켰을 때의 심정 비슷하다. 언어대중의 오용과 남용 때문에 본래 의미와 진실성을 빼앗기고 타락을 강요당해, 생기 없는 상투적 수사로 흐른 탓이리라. 그래서 늙은 여인의 요란한 화장처럼 안쓰러움까지 자아낸다.

그렇다고 추억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포장이 유치하고 진부하다고 해서 내용물까지 섣불리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추억은 인간 본능에 가까운 마음의 작용이므로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유익한 성분과 효능이 들어 있다. 마취, 진통, 환각 등을 그 주요성분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취제나 진통제 같은 약들이 실제 그렇듯이, 그런 것들을 오. 남용 없이 적절하게 잘 사용하면 고단하고 힘든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에 회사에서 부장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상사와의 불화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분노와 착잡한 심경을 가눌 수 없어 우선 거리로 나섰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대낮에 혼자 술집을 찾는 것은 삼류영화 장면 같아 쑥스럽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 징징거리는 것 또한 할 일이 아니었다. 퇴근시간도 아닌데 집으로 가서 앙앙대는 것은 더더욱 할 짓이 아니었다.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강원도 어느 지역이었다. 3년 간 군복무를 했던 곳이었다. 군대에서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나는 유달리 힘들고 어렵게 했다.(당시 중대장이나 선임하사가 그들의 30년 가까운 군대생활에서 나처럼 속썩이며 독특하게 고생한 사병을 별로 보지 못했다고 지금도 말할 정도이다). 이처럼 지긋지긋하게 군 생활을 마친 내게 뭐가 좋아서 그곳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제대한 지 16,7년이 되도록 별로 생각지 않던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동안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이라 뚜렷한 목적도 의도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요새 유행한다는 '추억여행' 같은 것과는 성격상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조그만 병촌(兵村)의 거리를 가출한 사람처럼 슬슬 돌아다니다 보니 그 동안에 변하지 않은 건물이나 골목이 더러 있어 반가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어 당시 고생했던 일들도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지난 군 시절을 되돌아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라는 이유만으로 지난날의 고통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린 것이다. 내가 싫어하다 못해 가장 경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그게 움트다니... 나는 질겁하여 그런 생각을 경계하고 차단하느라 애를 썼다. 아무리 과거라지만 내 군대생활의 고통까지 미화한다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추억'이라는 말 앞에 으레 붙는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도 질색하는 내가 여기에 빠져드는 것은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게 싫어 서둘러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그러나 이번에는 버스운전사가 내 마음을 가만 두지 않았다.

나는 평소 음악에 대해서 남다른 주견을 가질 만큼 잘 알지 못하고 가깝지도 않다. 그저 들리는 대로 듣다가 익숙해지거나 괜찮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다. 그러나 대중가요는 그 정도로도 친해지지 않는다. 가사의 대부분이 너무 직설적이거나 치기 만만한 탓이다. 그래서 대중가요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았다. 가사 없는 연주는 그런 대로 견디는데 가사가 나오면 듣는 데 상당한 불편이 따른다.

그런데 버스운전사는 흘러간 대중가요만 계속 틀어댔다. 짜증이 났으나 칼자루를 운전사가 쥐고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달리는 버스에서 내리든지 곱게 들어야만 했다. 하는 수없이 포기하는 심정으로 한참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른 사이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차츰 친밀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 역시 과거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미화하려는 마음이 일지 않나 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의 다른 한 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눈치챘다. 내가 끌린 것은 대중가요가 아니라 그 노래들에 묻어있는 추억이었다. 지나온 시절 싫건 좋건 내 의도와 관계없이 그 노래들은 있었고 내 삶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가령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미아리 눈물 고개...' 어쩌고 나오면 6.25 전쟁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아도 조무래기들은 철없이 나돌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르고 '유정천리' '비 내리는 호남선'이 흘러나오면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발악이 연상됐다. 최희준의 '하숙생' 김상국의 '불나비'에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한참 기승을 부리던 대학시절이 함께 묻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새 마음은 그 시절을 맴돌며 내 지난날의 고통과 불만, 후회 등에 슬그머니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은 일정한 줄거리도 없이 과거 속을 헤집고 다녔다. 더 나아가 어느 사안에 대해서는 반성과 후회라는 미명 아래 수정을 가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좋게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그것이 미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남들이 그러면 못마땅해 하던 것을 나도 그런 식으로 따르는 셈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추억'이라는 마취제에 취하여 속절없이 나를 내맡긴 것이다. 더 강렬한 환각이 작용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추억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그리고 추억 앞에서 스르르 무너지는 무력감이 고향집 골방의 어둑어둑함처럼 오히려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걸 즐겼다. 운전사에게 고마움까지 느끼며... 그토록 증오하던 내 군대생활에도 다른 시선의 여지를 둘 수 있게 되었다.

마취가 풀리면 들어 닥칠 통증이 두렵지만 '추억'은 그에 대한 면역성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통증이 없으면 어찌 건강하게 현실로 돌아올 것인가. 현실복귀에 필요한 강력한 힘까지 준 것이다.

다음날 회사로 돌아가 부장과 맞대고 일을 하는 데 따른 여러 가지 통증을 거뜬히 견디게 해 준 동력이 거기 있었다. 추억이 제공한 윤활유 덕분에 어긋나고 삐걱거리던 일상의 마디마디가 원활하게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 조달청 <바른 조달> 200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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