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07 ]칼럼니스트[ 2005년 9월 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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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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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친구가 현직 때부터 구상해 온 일을 구체화하려고 서두는데 마음먹은 것처럼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전전긍긍했다. 그 친구보다 먼저 일손을 놓은 ‘백수고참’의 처지에서 볼 때 성사되기까지 여러 가지 난관이 있고 자칫하면 크게 실망할 기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옆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어서 나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의 뜻대로 잘 되길 마음속으로 빌고 구체적인 말은 아끼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퇴직이후 인생이모작(人生二毛作)이 워낙 어려워 성공보다 실패한 사람이 너무 많다. 압축성장기를 거치면서 국가, 사회, 개인 할 것 없이 안전망 구축을 소홀히 하고 앞만 보며 달려온 결과다. 이를테면 인생이모작에 대한 전반적인 노하우가 매우 빈약한 것이다.

그래저래 그 친구의 동향을 걱정스럽게 주시하고 있던 어느 날 그가 매우 밝은 표정으로 새로운 작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일이 잘 풀리는가보다 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랐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밝고 넉넉한 표정인가.

나를 만나기 얼마 전 그의 고교동창 몇이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 대기업, 언론계, 금융계 등의 고위직 출신들이었다. 화제는 자연히 이모작이 되었고 전문가다운 전망과 기대, 포부와 실망, 만족과 분노, 울분 등이 대화의 주된 흐름을 이루었다. 그런 내용이 마신 술만큼 낭자해지자 그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고위공직자 출신이 입을 열었다.

먼저 친구들을 하나씩 거론하며 각자의 능력과 강점 등을 열거했다. 누가 봐도 우수한 고급인력임을 그는 인정했다. 그리고 그동안 현직에서 기여한 점들도 잘 짚어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어. 그건 다름 아닌 우리들의 막연한 자신감이야. 각자 자신들의 우수함과 그동안의 경험이 어디에 내어 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해도 사실 무리는 아니야. 그러나 내부를 냉정하고 엄밀하게 검색해보면 그건 매우 심각한 착각이야. 흘러간 물이란 얘기지. 섭섭하고 아쉽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그는 자신들의 능력과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젊은 층과 후배들에게 뒤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만큼 지식의 수명은 짧아지고 사회변동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 것이다. 그는 현직시절 사회 각 분야의 흐름을 접하면서 파악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조목조목 분석했다.

그의 이야기가 진행되자 불만과 의문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친구들이 그의 설득력 있는 판단과 해석에 차츰 공감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어렴풋이 느끼던 것을 그 친구가 분명하게 지적해 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실의와 아쉬움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허탈한 표정을 누구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것은 없어. 느이들이 그나마 경험과 실력을 살리고 여생을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봉사활동이야. 거기선 오늘의 우리들도 쓸모가 있어. 그러므로 우리를 필요하게 여기는 곳으로 가서 그 동안 사회에 진 빚을 갚아. 그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야. 물론 그 전에 인간의 가장 취약한 점이자 큰 부담인 집착과 과욕을 벗어야 하겠지만...‘”

자칫하면 윤리 도덕선생의 허황한 설교 같다고 치부될 내용이었지만 평소 그런 것과는 너무 먼 친구의 성격에다 속속들이 서로 잘 아는 자신들의 이야기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한 화제가 주를 이루던 자리가 그로 인해 밝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친구의 계획은 대폭 수정되었고 새 이모작을 위한 자기의 능력 재고파악을 곧 시작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친구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까지도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집착과 과욕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것이 말같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맑은 샘물처럼 머릿속을 흘러갔다.

‘중앙불교’ (2005  8월 2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