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00 ]칼럼니스트[ 2005년 8월 1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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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둥이로 다듬은 영어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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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1학기 영어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모두 단어장을 내놓으라고 했다. 대부분 손바닥만한 단어장을 각자 필요에 따라 만들거나 사서 쓰는 것이었고 정기검사 같은 것은 없던 터였다.

선생님은 학급 전체를 대강 둘러 보시더니 칠팔명을 앞으로 불러냈다. 공부깨나 하고 단어장 비슷한 것을 그런대로 갖춘 학생들이었다. 며칠전 중간고사에서 괜찮은 성적을 냈다고 칭찬받았던 상위권 학생들이라 은근히 또 다른 칭찬을 기대하며 나갔다.

반세기 전인 50년대 말, 그때는 아무나 중학을 갈 수 없었다. 웬만한 경제력을 갖추거나, 부모의 교육열이 괜찮은 집안 자녀가 아니면 중학진학이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퇴도 많던 시절이라 중학진학은 상당한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애가 학교를 그만 두면 그만큼 돈이 들지 않고,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도 있어 은근히 퇴학을 부추기던 부모들도 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려운 집 애들이 그래도 배우겠다고 모인 곳이 야간학교였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 심하던 때였으므로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중학 뿐만 아니라 고교, 대학도 야간학교가 성행했다.

우리 야간학교 학생들의 직업은 신문배달원, 동사무소나 파출소 사환, 노점상, 부두와 역전의 행상, 구두닦이, 열쇠 수리공, 철공소 공원, 약국 등 각종 점포 점원, 식당 종업원, 극장의 잡역, 버스정거장과 선창가에서 차표와 선표를 파는 애들 등 참으로 다양했다. 부모 보살핌 속에서 대낮에 6, 7교시씩 꼬박꼬박 수업을 받는 것은 아득한 먼 나라 일 같았고, 그 주간 학생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야간은 4교시 수업밖에 못했고 그것도 전기사정이 좋지 않던 때라 촛불을 켜고 하거나 아예 수업을 중단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날 불려 나온 애들은 그토록 불리한 여건인데도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영어 최고득점자도 야간에서 나왔다. 그래서 영어선생님이 약간의 과장과 감정을 섞어가며 우리들을 칭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선생님 표정이 매우 험했다. 한 친구의 단어장을 그대로 박박 찢으며 이따위로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며 호통을 치니 그나마도 없는 나는 사색이 되었다. 여학생 두명은 눈물이 쑥 빠지게 야단을 친 뒤 자리로 보내고 남학생들은 그대로 엎드리라고 했다. 언제 준비하셨는지 각목을 들고 오시더니 정확하게 열대씩 팼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한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나중에 군에 입대해서 구타를 당해보기 전까지는 가장 힘들고 끔찍했던 몽둥이 타작이었다.

이어 단어장 만드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큰 대학노트를 준비해서 정리하되 사전에 나온 풀이를 다 적으라는 것이다. come이나 go 같은 것은 1번부터 끝번까지 적으면 공책 한 페이지가 넘을 정도인데 그걸 다 옮겨써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쓰는 것 자체가 공부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걸 쉬는 시간, 화장실 갈 때, 잠자기 직전 등 자투리 시간에 소설 읽듯 그냥 읽고 또 읽으라고 했다.

참고서도 딱 한권을 정해서 책이 너덜너덜해질까지 역시 시도때도 없이 읽으라는 것이었다. 모르건 알건 죽죽 읽어나가라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어려운 글도 여러번 반복하여 읽으면 뜻을 스스로 깨우쳐 알게된다는 뜻)식이었다.

그래서 단어공책이나 참고서의 몇 페이지 몇째 줄에 파리똥이 몇 개 있고 어느 페이지 어떤 글자 옆에 무슨 자국이 있는 것까지 훤히 알 정도가 되면 영어실력은 저절로 늘어있을 거라는 말씀이었다. 국어공부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당시는 한자, 한문이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역시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라고 했다. 그리고 수학은 본격적으로 책상에 앉아 직접 연필로 계산하며 풀어야 한다고 다른 과목 방법까지 지시했다.

그리고 입시 답안지는 고학생이나 야간학생이라고 사정을 고려하거나, 그걸 분별해주는 장치도 없는 냉혹한 것이니 거기서 이기려면 알아서 하라고 했다. 자기의 불리한 여건과 불운한 처지를 탓하는 것만큼 못난 짓이 없으므로 대신 그만큼 더 노력하는 것으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자비한 몽둥이 찜질이나 뜻도 모르고 무조건 반복해서 읽으라는 거칠기 짝이 없는 방법을 요새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체벌, 폭력교사의 비교육적 처사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군말없이 그대로 실행했다. 그날 몽둥이 찜질을 당한 녀석들 중 두명은 지망고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다른 친구들도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했다. 나중에 영어를 평생 밥벌이로 삼은 친구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도 그 방법을 계속, 단어공책이 중학때 것까지 합해 20권 가까이 되었고 제2외국어인 독일어 공부도 그렇게 했다. 대학입시준비 막바지에는 그걸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 마무리정리를 했다.

나는 그 폭력적이고 무식한 방법에 길들여진 탓인지 지금도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지 않는 동안은 익숙한 영화를 올려놓고 집안을 오가면서 그냥 듣는다. 눈을 감고도 장면과 대사를 떠올릴 수 있도록 되풀이해서 보고 듣는다. 영어 듣기와 말하기가 좀 나아질까 해서이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그러나 그건 나이가 들어 학습능력이 떨어진 때문이지 그 ‘무지몽매한’ 방법이 비능률적이서 그렇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윤선생영어교실 ‘withyoon' 여름호 (20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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