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71 [칼럼니스트] 2005년 5월1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글보기 | 거시기머시기 | 손님칼럼 | 배달신청 | columnist.org(홈) |
'오바이트', 영어의 지방화?
박강문 (대진대학교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parkk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다 하면, 모조리 로마글자로 OPEN이라고 쓴다. '개점'이나 '개관' '개소' '개업'은 죽은 말이 되어간다. 이 모두 한자어들이니 OPEN이나 그것들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냐 하면 할 말은 없다. "열었소!" 라고 쓰면 더 좋을 것이다. 힘차게 팍 들어온다.

대학생 몇몇이 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지나가면서 듣자니 '오바이트' 어쩌구 한다. 지난밤 술 마신 이야기 같다. '오바이트'는 영어의 overeat이고 이미 수십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쓰이고 있는 낱말인데, 한국에서는 overeat가 '과식하다'가 아닌 '먹은 것을 토함'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한국식 영어다.

요즘 아파트들의 이름을 이국적으로 짓는 것이 유행이다. 무슨무슨 '팰리스'들이 여러 군데 생겼다. 영어식 발음으로는 '팰러스'가 되어야 할 '팰리스'를 미국에 오래 산 동포는 처음 들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른다. 무슨무슨 '빌'도 여기저기 세워졌다. 그런데 '빌'은 영어나 불어로 ville이건만 대한민국의 '빌'은 하나같이 vill이라고 쓴다. vill은 한국 고유의 표기다. 서양말 또는 그 비슷한 말로 지은 아파트 이름이 길고 복잡하여 외우기 어렵기 때문에, 집밖에 나갔다가 길잃은 나이 많은 분들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이름을 제대로 대지 못해 쩔쩔매는 일도 일어난다.

로마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은 로마 병사, 로마군을 상대하는 장사꾼, 현지인 행정관리 들이 쓰는 라틴어를 흉내내며 배웠다. 속지 출신이 많이 낀 식민지 로마 군대 병사들의 라틴어는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흉내내다가 틀리는 것도 나왔다. 변질된 라틴어들이 지방마다 생겨 제 나름대로 생명력을 지니면서 갈고 닦이어 갔다. 오늘날의 로망스 언어들, 예컨대 이탈리아말, 프랑스말, 스페인말, 포르투갈말, 루마니아말 들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라틴어의 지방화다.

로마 식민지 주민들이 흉내낸 라틴어는 본토의 표준 라틴어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만, "라틴어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새로운 어휘를 지어내기 때문에 서로 달라지기도 했다.

영어의 홍수, 그것도 얼치기 영어 흉내의 범람을 보고 메시꺼워하는 이가 많은데도, 어찌된 셈인지 유행의 물결은 거세기만 하다. 굳이 무식 유식을 따지고 언어사대주의와 속물주의를 개탄하기보다는, 영어의 지방화, 영어의 한국화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까? 영어는 현대의 라틴어니까?

로마의 식민지 주민은 라틴어를 흉내내도 되지만, 지금 우리는 식민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식민지 주민답게 살고 싶어 안달인 것은 아닌가. 영어 사용국에 유학하여 제대로 공부하고 온 사람은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잘 쓰지 않는다.

-2005.05.1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http://columnis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