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69 [칼럼니스트] 2005년 5월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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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나라가 있나?”
박강문 (대진대학교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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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가나 관리들이 독도를 제 나라 땅이라고 생떼를 쓰거나 과거의 침략행위를 미화하는 헛소리를 할 때마다 우리는 격분한다. 그리고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일본 국기를 태우면서, 그것이 재일동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일 두 나라 사이가 험하게 될 때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그들의 처지는 아주 어렵게 된다. “재일 한국인은 국가를 갖고 있지 않은 집단”이란 말은 그들이 겪는 상황을 한꺼번에 나타내 준다.

국가가 없는 집단이란 보호받기 어려운 집단이라는 말이다. 일본 패망 뒤 재일 한국인들이 해방된 조국에 가겠다고 무작정 시모노세키에 몰렸으나, 험한 해협을 건널 만한 배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더러는 작은 배를 타고 떠났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일본은 배를 마련해 주지 않았고, 조국 또한 배를 보내 주지 않았다. 조국은 보낼 배도 없었겠지만, 배를 보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또 일본은 재일동포가 모은 재산을 지니고 나가는 데 한도를 정했다. 많은 동포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동포가 재산을 가지고 올 수 있게 우리 정부가 신경을 썼던가?

‘저항과 극복의 갈림길에서 - 재일동포의 정체성, 그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김태영 지음, 강석진 번역)는 국가 없는 재일 한국인에 관한 책인데, 여기 보면 재일동포의 결혼이 지금은 8할 이상 일본인과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국적 취득자가 자꾸 늘어난다. 그들이 민족보다 현실적인 국가에 의탁하기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국가 없는 재일 한국인’도 얼마 안 가면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나라가 있나?” 하는 한맺힌 물음을 던지며 조국을 등지는 이들을 간혹 보게 된다. 재일동포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국내에 있던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됨을 싫다 하고 나간다. 그 떠남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것이 아니고 조국을 등지려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국가가 없는 한국인’이라고 느끼게 되는 국민이 나오게 되는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2002년의 서해에서 북한군의 기습으로 전사한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가 지난달 23일 인천 공항을 떠났다. 그가 바란 것은 ‘경제적 보상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사람들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애정’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라를 위해 간 분을 홀대하는 것은 (나라가) 썩은 것 아닙니까?” 햇볕정책 때문에 정부 관계자들이 조용히 있어 달라 했다니,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알 수 없다. 전사자 6명, 전상자 18명이 나온 큰 사건인데도, 1주기와 2주기 추모식에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고, 유일하게 위로 편지를 보내온 이는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다 한다.

3년전인 2002년에는 전 하키 국가대표선수 김순덕씨가 이 나라를 떠났다. 86년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88년 올림픽 은메달로 조국을 빛낸 그는 1999년 6월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로 유치원생 아들을 잃었다. 23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사고였다. 그해 11월 인천 호프집 화재로 50명 넘는 청소년이 떼죽음당하자 김씨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국민 안전에 무관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에 정을 붙이고 살 수 없다고 김순덕씨는 가족과 함께 떠났다. 자랑스러운 훈장들까지 모두 반납한 것은 국가에 대한 커다란 실망의 표현이었다.

우리 정부가 국민 돌보기를 등한히 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한국 출신 군인 또는 피징용자의 주검 확인이나 그 국내 송환을 위해 우리 정부는 거의 힘쓰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6.25전쟁이 휴전된 뒤에도 국군 포로나 포로 유골의 송환을 위해 노력한 바가 거의 없다.

성의 없는 정부 탓할 일만도 아니다. 고 한상국 중사 부인의 불만은 무관심한 국민들에게도 향해 있으니 나 자신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두 소녀의 죽음에 전국을 뒤덮다시피한 촛불 추모 행사가 있었지만, 조국을 지키다 목숨 바친 젊은 용사들에게 관심을 보인 국민은 얼마나 있었던가.

정붙이고 살 만한 나라를 만들자. “우리에게 나라가 있나?” 하는 물음이 없어지게 하자. 스스로 가슴 속에서 조국을 지우고 싶어하는 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 정부가 하지 않으면 국민이라도 해야 한다. 미국에서 한국을 위한 일로 곤경에 처한 로버트 김씨를 보살핀 것은 정부가 아니고 국민들이었다.

- 내일신문 '신문로 칼럼'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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