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netporter
"이제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는 개가 아니라 휴대전화다. 한국이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에 보도한 내용이다. 이 신문은 "국민 4분의 3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한국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휴대전화가 따라가지 않은 곳이 없다"면서 이 같이 보도했다.
지금 세계 언론들은 우리나라에서 뜨겁게 불고 있는 '휴대전화 열풍'에 주목하면서 앞을 다투어 한국의 유별난 풍속도를 소개하고 있다. 온 세상사람들이 아직도(?) e-메일에만 매달려 있는 사이에 한국인들은 휴대전화 메시지로 더 많은 문자를 주고받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휴대전화를 눌러대는 '엄지족'을 쉽게 볼 수 있다. 슬쩍 들여다보면 정보를 검색하거나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디론가 문자메시지를 날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나 젊은 사람이 전철 같은 곳에서 휴대전화를 그냥 손에 쥐고 있거나 목에 건 채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이다.
얼마 전 서울YWCA에서 조사한 내용은 휴대전화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 1300명을 대상으로 "무인도에 갈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을 물었더니 식량(33 .6%) 다음으로 휴대전화(21.5%)를 꼽았다. 이어서 컴퓨터( 18.6%), 친구(14.5%), 가족(11.8%) 순으로 나타났다.
이런 질문을 20대나 30대에게 했더라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기성세대들은 청소년들이 휴대폰을 친구나 가족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수긍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휴대전화야말로 친구나 가족보다 더 중요한 내 몸의 일부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온다면 난감해진다. 하루 일과 자체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마치 담배를 심하게 피우는 사람이 담배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일종의 금단증세마저 일으키게 된다. 이제 휴대전화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3년 전, 남태평양의 호주령 노퍽섬 사람들이 "휴대폰 없이 조용히 살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섬의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휴대폰을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들은 휴대전화용 이동통신망을 설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민투표에서 찬성 356표, 반대 607표로 부결시킴으로써 휴대전화를 쓰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첨단 테크놀로지에 의해 시간을 쪼개서 살아가는 생활보다는 현대문명의 이기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도 가끔 휴대전화와 담을 쌓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8순 노인들까지 갖고 있는 휴대전화를 외면하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면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속박을 받지 않아서 좋다는 얘기이다.
휴대전화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정보통신시대이다. 그런 만큼 서로 연락(통신)을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이런 탓에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본인은 편할지 모르지만 주변사람들은 불편해진다.
휴대전화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악도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휴대전화는 진화하고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 역할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누가 나에게 강제로 휴대전화를 못쓰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 '휴대전화 청정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태평양의 노퍽섬 사람들이 부럽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면 아찔(?)해 진다. 휴대전화 없이 정보화사회를 살아갈 자신이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 - SK텔레콤 사보 'it' 봄호 'IT 세상일기' 2005.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