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57 [칼럼니스트] 2005년 4월 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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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에게 기대하는 것
박강문 (대진대학교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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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이웃 때문에 한국만큼 고통을 겪은 나라도 드물다. 한국의 역사는 외부의 침략에 맞서 싸워 생존을 지켜온, 고난의 과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이웃들이 요즘 바통 이어받듯 한국민의 묵은 상처를 긁어댄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고대사 훔치기를 팽창주의적 차원에서 꾀하고, 일본은 끊임없이 그러나 비교적 조용히 독도를 제 것이라고 우겨오더니 이제 주한 대사, 주미 공사, 문부성 장관 등 일본 고위 관료 및 정치인이 줄줄이 나섰다. 일본 우익세력의 근대사 교과서 왜곡도 더 심하게 되풀이된다.  

한국민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일본의 한국 병탄이 한국민에게 축복이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꼭 일본 극우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몇을 빼고 한국인이라면 모두 끓어오른다. 이민족의 압제와 수탈이 축복이라고? 60년 전 일본의 터무니없는 독도 탈취 기도가 한국 병탄의 서막이었으니, 최근 일본의 생떼는 다시 축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란 말인가?

일본에 대한 분노는 무명 시민의 손가락자르기와 혈서, 그리고 투신자살 같은 극한적 행동으로까지 나타났다. 이런 자해 시위는 살벌하고 결코 찬양할 만하지도 않지만, 그만큼 울분이 크다는 것, 국민의 정신 건강이 이웃 일본 때문에 지금 엄청나게 상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시적으로 울분을 분출하기보다는 냉정히 대처하면서 장기적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야 옳겠지만, 그러기에는 한국민의 자존심이 너무 크게 다쳤다. 또, 대다수 일본 국민에게 관심이 없는 일이라거나, 일개 지방정부가 한 일이라거나 하는 말은 분명히 옳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일본 총리가 이웃 한국과 중국 등 여러 전쟁피해국의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야스쿠니 신사에 고집스레 참배하러 가는 것은 선거권자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불리하다면 굳이 그가 그리할 리 만무하다. 일본 외무성 장관이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걸고넘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1905년 강력한 군국주의 중앙정부 아래서 시마네현이 독자적으로 독도 편입을 고시했으리라고 믿는 한국인은 없다. 2005년 3월에는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통제할 수 없다면서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선포를 방임했다. 그것이 ‘사마네현 아가씨 뽑기’ 같은 단순한 지방 행사가 아니라는 것, 이웃나라와 마찰을 빚으리라는 것, 이런 빤한 것을 일본 중앙정부가 짐작하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된다. 알고도 그대로 둔 것은 역사와 한국민의 감정을 무시한 것이다. 한국민은 방임이 아니라 방조라고 본다.    

한국 대통령의 일본 관련 강경 발언을 ‘국내용’이라고 일본측이 평가절하한 것도 기분 상하는 일이다. 물론, 국내용일 수도 있고, 국제용을 겸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못박아  폄하하는 것은 외교적 무례로 지적된다.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도 우선적으로 국내용일 수 있다. 다만, 그들의 국내용은 이웃나라 국민의 마음이 상처받든 어떻든 거리낌없이 나오고 있다는 데서 국제적 오만의 표출이라는 성격을 띤다.    

한국민이 우려하는 것은 일본 집권층의 발언만이 아니라 일본 보통사람들의 마음이다. 국수주의, 팽창주의, 패권주의, 군국주의 인물들이 정치적으로 전보다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면, 일본 국민의 심정이 그쪽으로 흐르고 있어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 나라 국민의 의식 수준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오랜 역사를 통해 원수지간이던 프랑스와 독일은, 50여년간 함께 전후 통합유럽 건설의 주축으로서 잘 협력해 오고 있다. 두 나라는 역사 교과서를 공동집필하고 있으며, 공동 설립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 기동타격군까지 공동 창설했다. 이 두 나라 국민들은 적대감 없이 잘 지낸다. 이런 일들은 독일이 전과를 참회하고 신뢰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졌다.  

일본 스스로를 위해, 또 한일 두 나라의 번영을 위해, 일본이 취할 수 있는 길이 아주 가까운 데 있음을 일본 국민이 깨닫기를 한국민은 간절히 소망한다. 정치를 바꾸는 것은 국민이다. 세계와 역사를 넓게 보는 인사들이 나라 일을 맡도록 하고 편협한 이들이 설 땅을 좁히는 것은 일반 국민이 선거를 통해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두 나라가 협력하여 잘 치러낸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밝고 훈훈한 우정의 싹을 그 때 보았다. 일본이 이웃나라를 불안케 하면서 세계의 지도국을 바란다면 헛된 꿈일 뿐이다. 두 나라 국민이 함께 손잡고 공존공영의 21세기를 열어나갈 수 있기를 빈다.    

- 내일신문 '신문로 칼럼' 200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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