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52 [칼럼니스트] 2005년 3월 1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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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없는 시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http://columnist.org/netporter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도토리다. 도토리는 떡갈나무를 비롯한 졸참나무, 물참나무, 갈참나무, 돌참나무 등 참나무과의 열매를 말한다. 어릴 적에 산에서 도토리를 발견하면 까먹고 싶은데 너무 떫어서 버려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토리를 죽같이 쑨 뒤 굳혀서 만든 도토리묵을 즐겨 먹는다. 한정식집에 가면 반찬으로 나오기도 하고, 막걸리를 마실 때 먹는 도토리묵은 맛이 일품이다. 요즘에는 웰빙식품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그동안 현실공간에서 나무열매로만 취급받았던 '도토리'가 불과 1년 사이에 사이버세상을 누비는 네티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도토리의 많고 적음은 사이버세상에서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를 가름하는 척도가 될 정도다. 도토리가 많을수록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도토리'는 최근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싸이월드 내에서 통용되는 전자화폐 이름이다. 싸이월드 이용자들은 자신의 미니룸을 꾸미거나 배경음악을 깔기 위해 유료 아이템을 구입할 때 도토리를 이용한다. 도토리를 사려면 전자결제 시스템을 이용해 현금으로 충전하면 된다. 현금과 도토리의 교환비율은 100 : 1, 즉 한 개의 값이 100원이다.

회원수가 1천300만명이나 되는 싸이월드 가입자들에게 도토리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는 하루 평균 거래액이 2억원에 이른다는 사실로 충분히 입증된다. 지난달 설에 맞춰 취업 전문업체 '스카우트'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상사로부터 받고 싶은 설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아본 조사에서도 '도토리'(20.5%)가 현금(46.7%)에 이어 2위로 꼽힐 정도였다.

도토리라는 이름은 싸이월드의 이동형 상무가 제안한 것으로, 마을 뒷산의 도토리를 주워 책상서랍에 모아놓고 들여다보며 보물상자라도 가진 양 즐거워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게다가 '도토리 키재기'라는 속담에서처럼 도토리는 크기가 고만고만해서 '사이좋은 사람들'이라는 회사의 창건이념에 쓰이고 있는 '사이좋다'는 컨셉과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이버캐시를 처음 만들어 이름을 정할 때 팀원들끼리 익명투표를 한 결과 이상무의 '작품'으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네티즌들의 사람을 듬뿍 받고 있는 사이버머니 '도토리'가 14일부터 전국 3천500여개 서점과 8천여개 문구점에서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종이상품권'으로 선을 보였다. 상품권은 3천원, 5천원, 1만원권 등 세 종류. 18일부터는 편의점 'GS25'와  네이트닷컴 쇼핑몰에서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상공간에서 통용되고 있는 전자화폐 '도토리'가 무엇 때문에 현실세계로 넘어와 종이로 된 상품권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싸이월드측이 돈을 더 벌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회원들이 요구했기 때문일까.  

"고객들이 '도토리'를 선물용으로 많이 사는데 '실물'이 없다는 점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어 구매자가 직접 선물하는 느낌이 나도록 하기 위해 상품권을 제작했다"는 것이 회사측의 설명이다. 이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속담에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도 그림 속에 있으면 먹을 수가 없다. 먹을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비슷한 예로 아무리 마음에 드는 그림을 갖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살수가 없다.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그림인 만큼 함부로 만지기도 어렵다.

마음에 드는 것을 만져보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속성이다. 화면에 보이는 물건이 아무리 멋진 것이라도 어디까지나 '허상'이기 때문에 실물을 보고 만지는 것만은 못하다.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탓이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필자의 후배가 속해 있는 어느 동호회가 홈페이지를 개설한 뒤 오래 전부터 만들어왔던 종이회보를 없애고 전자회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3개월도 가지 않아 종이회보를 복간해야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회원수가 30여명이었는데, 웬일인지 모임에 나오는 인원이 급격히 줄더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화상으로만 보는 회보는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모임에도 나가기 싫었다는 회원들의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다시 종이회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이용이 보편화되고 홈페이지를 만드는 회사나 단체가 늘어나면서 종이사보가 전자사보에 밀려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얼마가지 않아 종이사보를 다시 만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컴퓨터화면에 뜨는 전자사보는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불만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1998년 초 데이콤이 인터넷기업으로 변신하면서 종이사보를 폐간했다가 2년 반만인 2000년 8월 복간했고, 1995년 6월에 우리나라 최초로 인터넷 검색사이트로 출발했던 심마니도 4년 반동안 온라인으로만 정보를 제공하다가 결국은 '심마니라이프'라는 종이 사외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인터넷만으로는 네티즌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사실 많은 전문가들이 인터넷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종이를 사용할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지금도 "결국 종이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종이의 사용량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머지않아 페이퍼레스(Paperless)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의 체면을 구길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관공서나 대기업에서 원가절감과 업무의 능률 차원에서 '종이보고서'를 없애고 있다. 국회에서도 행정부처나 공공기관에 관한 국정감사자료를 대신 '디지털서류'로 받는  추세이다. 2007년부터는 형사재판에서도 종이서류가 없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종이의 사용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보고서를 제출하고, 필요한 자료를 컴퓨터나 디스켓에 저장시키면서도 이것들을 따로 문서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물을 손에 쥐고 싶은 본능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정보화사회를 맞아 업무량이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프린트해야 할 일도 많아진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덕분으로 웬만한 일은 사이버공간에서 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물건을 만져보고 싶은 본능이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본능과 욕망이 인간에게 존재하는 한 '종이 없는 시대'나 '종이책의 종말'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 200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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