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43 [칼럼니스트] 2005년 2월 1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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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여행 - 자치기와 골프

이규섭 (칼럼니스트,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허공을 가르고...승부는 가리고..."닮았네"

추억이란 오늘의 창을 통해 어제를 되돌아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시간여행이다. 과거의 시간 속에 꼭꼭 숨어 있는 기억이기에 소중하고 애틋하다. 가슴에 묻어 둔 추억의 파편들을 끄집어내면, 한 여름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기쁨이 되고 아리도록 파란 슬픔이 묻어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복고(復古)바람'이 부는 것도 가난했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향수 서린 그 때 그 시절의 물품과 먹거리를 즐겨 찾는 것 또한 추억의 자맥질이다.

추억은 마른 비스킷처럼 팍팍한 세상살이에 혀끝을 감치는 말랑말랑한 힘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무지개 빛 감도는 비누방울처럼 영롱하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보릿고개시절 시골에서 자란 세대에겐 변변한 놀이가 없었다. 짚과 새끼를 똘똘 뭉쳐 만든 공으로 공차기를 하거나, 어쩌다 마을에서 돼지를 잡으면 돼지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풍선처럼 가지고 놀았다.

딱지치기는 종이가 귀하던 때라 돌가루 포대(시멘트 포장)로 '복 딱지'를 두툼하게 접어 따먹기를 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구슬은 언감생심 엄두를 못 내고 찰흙으로 구슬을 만들거나 동굴동굴하게 생긴 굴밤을 모아 구슬치기를 했다.

사내아이들끼리 패를 나누어 할 수 있는 공동놀이가 자치기다. 공 대신에 작은 나무막대를 치는 놀이다. 준비물은 간단하다. 60㎝ 안팍의 약간 굵은 긴 막대기(어미자)와 13㎝정도의 가늘고 짧은 막대(새끼자)만 있으면 그만이다. 흔한 것이 나무밖에 없는 시골이니 자치기 기구는 뚝딱 만들 수 있다.

우선 가위바위보로 편을 가른다. 이기는 편이 공격조, 지는 쪽은 수비다. 새끼자 양쪽을 45도 정도로 비스듬히 깍은 뒤 맨땅 위에 놓고 어미자로 가볍게 끝을 때려 공중에 띄운 뒤 멀리 되받아 친다. 멀리 날려보낸 뒤 어미자로 거리를 측정하여 승부를 가린다.

'구멍 자치기'는 땅에 원을 그리고 원 가운데 조그마한 구멍을 파고, 새끼자를 걸쳐놓는다. 그리곤 어미자로 멀리 떠서 날린다. 수비쪽에서는 새끼자가 멀리 날아가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거나 발로 밟는다. 놓치는 틈을 이용해 야구 주자처럼 삼각형의 1루를 향해 달린다. 새끼자가 수비수 손에 잡히면 야구처럼 아웃이다. 몸으로 막았을 때는 새끼자를 던져 원안에 들어가면 역시 아웃이다.

간단한 놀이지만 잣 수를 싸고 다투기도 하고, 맨 땅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다치는 게 예사다. 새끼자 끝이 뾰족하여 위험이 많은 것이 흠이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철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흙 묻은 옷을 털며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추위도 모르냐"며 혀를 끌끌 찼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대문 밖에서는 아이들이 "친구야 놀∼자"하며 마을공터로 끌어낸다. 자치기는 팀워크와 함께 공간의 넓고 좁음에 따라 자신의 기술과 요령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환경과 여건에 순응하면서 거리를 측량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놀이다.

자치기와 닮은 것이 골프다. 막대로 쳐서 멀리 보내는 것과 골프채로 공을 날리는 점이 비슷하고, 편을 갈라 승부를 가리는 것은 같다. 다만 '구멍자치기'는 구멍에서 새끼자를 쳐내는 것이지만 골프는 작은 구멍에 공이 잘 들어가게 하는 것이 다르다.

대부분의 전래 민속놀이가 그렇듯이 자치기 역시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단지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와 공터만 있으면 놀이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내려 온 놀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골프 또한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이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지팡이로 돌을 쳐서 토끼 굴에 넣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설을 믿는다면 우리의 자치기 유래와 다를 바 없다.

'블랙 탱크'라는 별명의 프로골퍼 최경주 선수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1년 때. 체육선생님이 "골프가 어떤 운동이냐"고 물었을 때 "그거 자치깁니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린 시절 자치기를 하며 놀았던 완도 섬 소년이 한국인 최초로 미국 PGA우승선수로 세계에 우뚝 선 것은 자치기의 내공 덕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인가.

요즘 아이들의 놀이문화는 다양하다. TV와 VTR 등 영상문화를 즐기고, 컴퓨터게임이나, 전자오락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른다. 답답하면 밖으로 나와 자전거를 타고 롤러스케이트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생기는 스트레스를 날린다.

자치기, 사방치기, 고무줄놀이 등 전래의 전통놀이가 공동의 참여를 통해 또래집단의 끈끈한 우정과 공동체의식을 키웠다면, 요즘 아이들의 놀이문화는 놀이라기보다 노는 것에 가깝고, 개인화 경향이 뚜렷하다.

자치기를 하며 놀던 그 시절 코흘리개 친구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그립고 보고싶다. 이제는 대부분 반백이 되어 시대의 뒤안길에 밀려날 세대다. 잘 나가는 친구는 자치기 막대 대신 골프채를 휘두르며 필드에 나갈 것이고,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구는 척추가 휜 세월을 힘겹게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과거는 촌스럽고 우스꽝스럽지만, 자치기의 추억은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동심을 떠올릴 수 있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디지탈 포스트> '0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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