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66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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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희망을 통역해 준다
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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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암울하기만 하던 독재정권 시절, 이에 항거하다 감옥에 들어간 한 민주인사는 분노, 절망감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이끌어 갔다. 자신도 모르게 왜소해지는 듯한 느낌과 무력감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 해따라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 추위까지 그를 괴롭혔다. 겨울의 끝 무렵 그의 심신은 몹시 지쳐 있었다.

봄이 왔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마취에서 덜 깨어난 것처럼 좀체 풀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라면 그 어떤 해독제라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막사 바깥의 한 귀퉁이에서 연약하면서도 당차게 올라오는 새싹을 발견했다. 시멘트 바닥 사이의 비좁은 틈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씨가 그렇게 싹을 틔운 것이다. 가냘프기 짝이 없으면서도 시멘트 못지 않게 딱딱하고 열악한 맨 땅을 뚫고 나오는 그 강인한 생명력을 깨닫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한참 뒤 눈물을 씻고 일어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기가 돌고 있음을 느꼈다. 심신을 갉아먹던 노폐물과 독소가 완전히 제거된 기분이었다. 열병을 지독하게 앓고 난 다음의 상쾌함 같은 것이었다.

해마다 오는 봄이건만 그는 그때 처음으로 봄의 진면목과 엄청난 에너지를 절감했다. 그리고 봄이 통역해 준 희망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사서오경 중의 하나인 주역의 64괘 가운데 세 번째가 둔(屯)괘다. 첫 번째가 하늘을 의미하는 건(乾)괘이고, 두 번째는 땅을 가리키는 곤(坤)괘이다. 즉 천지가 이루어진 뒤를 둔괘가 이은 것인데 屯(둔)은 땅속의 식물이 새싹을 틔워 지표면으로 솟아나오는 것을 형상한 글자이다. 따라서 屯(둔)은 만물의 시작을 의미한다.

屯밑에 날 일(日)자를 붙이면 식물이 햇볕을 받아 싹이 나옴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봄을 뜻하는 春(춘)자가 되었다. 뭐니뭐니 해도 봄의 으뜸 상징은 땅을 뜷고 올라오는 새싹임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말의 '봄'도 새싹을 뜻하는 '움'의 변형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역시 새싹이 나오는 계절임을 그 어느 것보다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새싹은 문자 그대로 싹이 새로 나오는 것으로 여름의 무성함과 가을 결실의 시발점이요, 멀고 먼 장정의 첫 걸음이다. 그리고 새싹 속에는 성장과정이 순탄하고, 결과가 충실하도록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희망이라는 막강한 동력장치가 장착되어 있다. 따라서 새싹이 없다면 그건 절망 그 자체이다. 봄이 우리에게 전하는 평범하면서도 진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희망이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무거운 흙의 두께를 뚫고 나올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것은 희망과 생명력밖에 없다. 즉 희망이 있는 한 어떤 시련이나 극한 상황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리는 쇠뜨기는 새싹 안에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한다. 승용차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타이어 압력이 2기압인데 쇠뜨기 새싹의 팽창 압력은 수십 기압에 이르러 아스팔트까지 뚫고 나온다는 것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무서운 힘이다. 쇠뜨기는 극단의 예이겠지만 다른 식물들 역시 이보다는 못하다 해도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지각을 뚫고 나온다.

식물이 이럴진대 우리라고 그런 힘이 없겠는가. 우리도 내면의 재고목록을 자세히 훑어보면 그 동안 방치된 에너지와 희망이 어느 구석엔가 쑤셔박혀 있을 것이다. 봄은 그런 것들을 밖으로 들어내 우리 자신을 쇄신하도록 요구한다.

겨우내 짓눌리고 움츠린 심신을 펴게 해 주는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봄을 찾으러 먼산을 헤매다 돌아오니 자기집 매화나무에 이미 와 있더라는 어느 게송(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한 시구)처럼 무조건 멀리 밖으로만 나가서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서 봄과 희망을 찾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봄을 낭비하고 희망을 놓쳐버린 이들이 으레 내뱉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 같은 말이 곁에서 어슬렁거리지 못할 것이다.

- 쌍용자동차 '네바퀴로 가는 길' 3월호(20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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