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63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1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홈) |
웃음은 과소비가 미덕이다
박연호                                        
ynhp 'a' naver.com
http://columnist.org/ynhp

나이 70 가까운 분이 동네 시장에서 과일을 사가지고 와서 먹어 보니 기대와 달랐다. 워낙 급하고 까다로운 성격인 그 분은 불같이 화를 내며 가게로 쫓아 갔다. 아주 못먹을 정도는 아니어서 식구들이 말렸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예상과 달리 환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평소에도 웃음기라고는 별로 없는 사람이 다른 과일까지 한 봉지 더 사들고 오니 놀랄 노릇이었다. 이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식구들은 배꼽을 잡았다.

그 가게를 찾아가서 속였다고 야단을 치니 웬만한 사람 같으면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되잡을텐데 가게 여자는 한참 듣더니 갑자기 웃음을 웃으며 "세상에... 장사꾼 말을 그렇게 다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순진하기도 하셔라" 하며 눙치고 나왔다. 그리고 되가져 온 과일을 꺼내 한입 베어먹더니 한술 더 떴다. "내가 먹어 봐도 별로인데 아저씨가 그러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하면서 어안이 벙벙해진 노인에게 다른 말을 할 틈도 주지않고 얼른 바꾸어 주었다.

그 식구들에 따르면 먼저 것이나 나중 것이나 그게 그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족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그 가게 단골이 되었다. 그녀는 과일이 아니라 웃음과 재치, 그리고 노인에 대한 정확한 심리 파악으로 도리어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유태인 속담에 '사람을 알려면 그의 포도주잔, 분노, 지갑을 보라'는 말이 있다. 술버릇과 성품, 재산을 보면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데 분노 대신 웃음을 넣기도 한다. 분노와 웃음은 성품의 안팎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음이 아프면 웃으라'고 권한다. 웃는 가운데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유태민족의 수천년 우스개를 모은 책 '웃을 만한 이야기'의 서문에도 "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이 책의 충실한 친구가 되게 하라. 그리고 학식 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우쭐대는 사람 등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알맞은 것을 선택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꽃을 꺾도록 하라"고 밝혀 웃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재치와 해학으로 난관을 타개하는 유태인의 지혜와 생활철학이 농축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과일가게 아주머니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유태인들처럼 힘든 상황에서 웃을 여유를 가진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대부분 종업원들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며, 외국인들이 늘 지적하듯 일반시민들도 늘 화난 듯한 표정이다.

중국에도 '미소가 없는 사람은 기업을 경영하고 사람을 지도할 자격이 없다’는 격언이 있다.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 부하를 거느린 직장의 상사,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 등 불특정 다수를 늘 접하는 사람은 미소가 필수라는 말이다. 웃음은 강력한 에너지이자 생활의 활력소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아닌 개인들간의 관계에서도 웃음은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언제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처리하며, 남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의 핵심은 웃음에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나이 많고 적음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웃음으로 자신을 늘 젊게 만들고, 남에게는 활력과 편안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세상에 보내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게 했더니 꽃과 어린이 미소, 어머니의 사랑 세 가지를 들고 왔다. 그러나 최종 결선에서 꽃과 어린이 미소는 탈락했다. 꽃은 나중에 시들고, 어린이 미소는 나이가 들면서 변질되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린이 미소가 자연산 무공해 제품이라면 어른들의 웃음은 그에 비해 순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도 어린이들은 하루에 400번 이상 웃는데 어른들은 15번 정도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숱한 우여곡절과 번민에 노출되기 마련인데 어찌 아늑한 어머니 품안에서처럼 순진무구하기만 하겠는가. 그래도 긴 세월 부대끼면서 순도를 잘 유지해온 이들의 웃음은 어린이 미소 못지 않게 상대를 감동시킨다. 웃음이야말로 원가가 크게 들지 않으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이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뜨거운 여름날 아랫밭에서는 농부 여럿이, 밭두렁 하나를 경계로 한 윗밭에서는 부부 둘만이 김을 맸다. 아랫밭 사내들은 질펀한 음담 패설, 우스개로 앞다투어 웃고 떠들면서 땡볕과 고역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걸 한참 듣던 윗밭의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저 사람들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나요. 불볕 여름 긴날에 이리 힘든 일을 하면서 괴로움을 잊고 졸음을 쫓는 방법으로는 저렇게 웃고 떠드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는데 당신은 입을 꿰맨 것도 아니고 아침밥을 거른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입을 닫고 있어요?"하며 핀잔을 주었다.

이에 남편은 "온종일 떠들고 웃으면 뭘 해? 그래봐야 입 아프고 배만 고프지" 하면서 집에 가서 밤에 진짜로 사랑을 하면 될 것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송세림(1479 -?)의 '어면순(禦眠楯)'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 농부는 헛되게 웃어봐야 무슨 실속이 있느나며 일축했다. 진짜 행위에 비하면 웃음이란 하찮다고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 달리 부인은 행위 못지 않게 유머와 웃음의 효능도 매우 탁월함을 꿰뚫고 있었다.

지금 의학, 심리학, 경영학 등 각 분야에서 실험을 통해 웃음에 관한 그녀의 견해가 속속 입증되고 있다. 미국의 사우스웨스트 항공사 등 세계 곳곳의 기업들이 웃음경영을 도입, 매출액을 늘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대체로 웃음에 인색, 그렇잖아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더욱 고달프다. 반면 쓴웃음, 비웃음, 냉소, 헛웃음, 아첨을 위한 억지웃음, 음흉한 웃음 등 왜곡된 웃음이 판치고 있다. 오염도가 높은 유독성 웃음들이다. 그런 웃음들은 세상살이를 더욱 각박하고 어지럽게 할 뿐이다.

데일 카네기는 '웃음예찬'에서 "웃음 없이 참으로 부자가 될 수 없고, 웃음을 달고 살면서 정말 가난한 사람도 없다.(중략) 웃음은 피곤한 자에게 휴식이요, 실망한 자에게는 소망이며, 우는 자에게 위로가 된다.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염된 웃음들은 이런 기능을 할 수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 타산적이지 않는 인간관계 등 순수를 바탕으로 한 웃음만이 묘약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웃음은 아무리 과소비를 해도 괜찮다. 그럴수록 살맛이 나기 때문이다.

- 증권예탁원 사보 봄호(2004 03)


-----
박연호 글 목록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를 평가해 주십시오.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