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58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1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듣는 것도 기술이다

최근 백수들이 모여 '구직기원' 이색파티를 열었다는 화제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20대 미취업 졸업생 80여명이 모여 연극, 힙합 공연, 퀴즈대회 등을 통해 한 때나마 취업의 압박감에서 해방되었다. 소주에 과일즙을 섞은 '취업기원주'를 만들어 "우리는 일하고 싶다!"고 건배를 하며 구직의 의지를 다졌다.

이 자리에서 백수들은 "취직했니?"라는 인사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라고 털어놓았다. 일상에서도 남의 걱정을 해주고 위로한답시고 무심코 던지는 말이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경우가 흔하다.

구조조정으로 밀려났거나 퇴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가다 만나거나 모임 때 가장 대답하기 거북한 말이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인사다. "지난해와 똑같아"하고 대답을 비껴가려면 "지난해는 뭘 했는데?"라며 꼬치꼬치 따지면 은근히 부화가 치솟는다.

가장 기분 좋은 말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한다"는 말일 게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은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라고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다. 또 여자가 남자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았을 때 "넌 그것 하나도 해결 못해"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보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듣는 기분 좋은 말은 "난 너를 믿어"다. 이 말 한마디엔 돈독한 신뢰가 담겨 있다.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어야 신뢰가 간다. 우리가 정치인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이 없고 상황에 따라 말을 예사로 뒤집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비리의혹이 제기되면 처음엔 "한 푼도 안 받았다"고 뻔뻔스럽게 잡아뗀다. 수사결과 사실로 확인되면 드러난 만큼 인정하거나 궁색한 변명으로 발뺌하기 일쑤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이 담긴 말이고, 리더가 아랫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말은 겸손과 책임이다. 초등학교 출신인 일본의 다나카 前 수상이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화다. 엘리트 관료집단의 본산인 대장성에는 동경대 출신들이 많아 노골적인 불만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1분도 안 되는 취임사 한마디로 그들의 우려와 불만을 일거에 해소했다."여러분은 천하가 알아주는 수재들이고, 나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대장성 일에 대해서는 깜깜합니다. 따라서 대장성 일은 여러분들이 하십시오. 나는 책임만 지겠습니다"

대장성 직원 모두를 리더로 인정해주는 순간, 그들의 우려는 신뢰로 바뀌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자세, 아랫사람에 대한 존중,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세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말이 많다고 감동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만 해도 위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상사들이 많았다.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 윽박 지르거나, "요렇게 밖에 못해"하고 모멸감을 주는 경우가 있다. 요즘 이런 상사가 있다면 부하직원들로부터 지탄받을 게 뻔하다.

결재할 때도 요령 있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거나 "이런 점은 좋은 데 이 부분은 이런 보완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면 수긍하고 미흡한 점을 인정하겠지만, 무안을 주고 윽박지르면 반발하거나 구차한 변명만 듣게 될 뿐이다.

리더십의 덕목은 아랫사람을 휘어잡으려 하기보다 듣는 자세다. 듣는 것도 기술이다. 아랫사람이라도 그 말에 맞장구쳐주면 신바람이 난다. 라디오 패널로 출연하여 느낀 점이지만, 진행자는 연신 "네" "그렇군요"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따라서 스스로의 말에 자신감을 얻게 되고 말의 공백이 생기지 않으니 청취자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된다.

듣기만 할게 아니라 상대방이 한 말을 재구성하여 들려주면 기분 좋아한다. "지금 한 말은 결국 이렇고 저런 의미가 되겠군요"하면 제대로 의사가 전달된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감정의 이입도 중요하다. "물론 그렇겠군요. 마음이 너무 상했겠어요"하고 공감해주면 위안이 될 것이다. 아랫사람이 열심히 설명을 하는 데 듣는 둥 마는 둥 한다거나, 허공을 쳐다보거나, 무시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누가 마음을 열겠는가. 설득의 전제 조건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리더가 정직하고, 비밀을 지켜주고, 관대하면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 CEO Report 2004.03.10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를 평가해 주십시오.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