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54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1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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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갈라서는 마당에

이혼시대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파경이 보편화되었다. 이혼률 38%로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위를 자랑(?)하며 그 증가속도 또한 어찌 빠른지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이에 질세라 재미동포들은 세계 1위인 미국인들의 평균이혼률보다 높으며, 캐나다에 사는 한인들도 이혼률 50%를 넘었다는 소식이다. 북한을 탈출, 사선을 같이 넘으며 한국으로 온 탈북자 부부들의 이혼도 급증하고 있다. 한국보다 더 가부장적인 북한 남성들의 위세를 참고 지내다 그래도 여성의 지위가 좀 나은 남한 땅에서 반기를 든 것이다.

이혼에 관한 한 나라 안팎의 손발이 척척 맞는 셈이다. 선진국, 그 가운데서도 미국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흉내내기에 혈안이 된 우리답게 '이혼의 선진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아는 이나 이웃끼리 결혼한 자녀가 잘 살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 실례인 세상이 되었다. 주례 앞에서 맹세한 다짐이 귓가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돌아선 부부들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수품에 쏟는 지나친 낭비가 다소 줄었다는 긍정적인 면도 나타나고 있다. 언제 이혼할지 모르는 판이라 집장만 등 여러 가지 혼수품 마련에 주춤거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적인 면에서 ‘이혼의 선진화’가 이루어졌으면 질적인 면에서도 선진국형으로 바뀌는 것이 어떨까. 즉 결혼과 이혼에 대한 문화적 배경, 습관, 사고방식 등이 다르지만 이혼 자체가 서양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이고 보면 그 처리 방법도 좀 닮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가정해체로 인한 자녀 및 당사자들의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면서 친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낸 두 저명인사가 마침내 사돈까지 맺었다. 지성인으로 부유한 집안들답게 결혼식은 품위 있었고, 신랑 신부가 된 자녀들 역시 그 부모들의 교양과 덕망을 이어 받아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그 결혼을 부러워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이 이혼했는데 양쪽집은 서로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혼의 원인이 다름 아닌 혼수품이었다. 누구보다도 사랑과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두었던 그들이 혼수품 때문에 싸우고, 그렇게 친하던 사돈끼리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부으며 헤어졌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이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유명인사들의 혼사가 이혼으로 이어지고 쉬쉬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들은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옆집 드나들 듯 하여 넓고 깊은 견문을 자랑하고, 자녀들인 신랑 신부들도 외국 유학은 기본이어서 사고나 행동이 상당히 세련된 이들인데 이혼에 대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아량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면 역시 전통과 문화, 관습의 영향력이 매우 큰 모양이다. 그런 집안들이 그럴 정도이니 일반 서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혼, 재혼, 독신 등을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인 생활 형태로 보는 시각이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당사자 나름대로의 방식이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정이 원만한지 못한 경우 하루하루가 지옥인 결혼생활보다는 갈라서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조선조 5백년의 유교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어 이혼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크게 부담되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저주의 강도도 높아 다시는 보지 않을 원수가 된다. 그로 인한 자식들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 갈라섬!
레스터와 베티는 6년만에 빛을 보았습니다. 1966년 11월 8일 결혼하고 1972년 11월 6일 이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행복한 마음으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입니다. 연락처 레스터 555-6500 (오후 9:00 이후) 베티: 555-1115 (아무때나) "

" 공식선언문
콜린과 마이클은 밝은 마음으로 악의 없이 헤어졌습니다. 콜린은 하니크릭 타워에서 행복하게 살고, 마이클의 거주지는 그의 보트로서 정처 없이 영원히 떠돌아 다닐 것입니다."

" 행복한 마음으로
라이오닐과 제인은 기쁜 마음으로 딸 자넷이 '그 남자'와 모든 법적 관계를 청산하게 된 것을 알려드립니다. 8월이면 자넷은 이제 새롭고 아름다운 독신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남자는 _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보살피시어 _ 다른 곳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저명한 인생상담칼럼 "디어 애비"를 담당했던 애비(Abby)여사가 추천한 이혼선언문이다. 갈라선 뒤에 자신들이 거주할 곳이나 연락처를 당당히 밝히고, 상대방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을 보면 이혼도 선진국형(?)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은 효도가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로 부모를 잘 섬겼다. 어느 날 부모에게 드릴 요리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하여 부인을 내쫓을 정도였다. 아무리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절대적 기준인 시대라 하더라도 도를 넘어선 효성이라는 비난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증삼의 깊은 마음을 모르는 소치라는 반박이 있다. 아무리 증삼이라 하더라도 그런 하찮은 이유로 이혼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부인에게 중대한 결함이 있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드러내면 부인이 재가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가장 가벼운 이유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헤어지는 마당에 할 수 있는 배려였다.

이혼을 당연시하거나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이라면 이 정도로 상대를 배려할 여유 정도는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그것이 이혼의 가장 큰 피해자인 자녀들과 당사자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길이 될 것이다.

- '지방행정' 3월호(20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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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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