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44 칼럼니스트 2004년 2월 2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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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가 만난 영화제 사람들(9)>
베를린영화제- 그 수장 디이터 코슬릭과 막료들

    1956년 이병일 감독이 만든 <시집가는 날>이 제7회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영화가 국제영화제에 진출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특별상인 은곰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시대'를 연 대 사건이었다. 1962년에 또다시 아역 배우 전영선이 신상옥 감독의 <이 생명 다하도록>에서 특별상인 은곰상을 다시 거머쥐었다.

    프랑스 칸영화제에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가 1984년에 처음 소개된 것에 비한다면 베를린영화제야 말로 우리영화와 가장 오랜 인연을 갖고 있는 영화제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베를린영화제의 장벽은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장벽처럼 높기만 하다. 제53회 영화제를 거쳐오면서 한국영화가 본 상을 수상한 것은 이 두 편 뿐 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몇 편의 한국영화가 본선 경쟁에 올랐었다. 그러나 수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두 편의 우리영화가 은곰상을 탄 이후 20년이 지난 1981년에 <만다라>가 본선에 올랐지만 본상 수상은 못하고 '심사위원평가인정상'에 그쳤다. 임권택 감독은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좀 관심을 갖고 베를린영화제에 접근했었다면 본 상 수상은 가능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지금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후 1985년 하명중 감독의 <땡볕>, 1986년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1996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2000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2002년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가 본선인 경쟁에 올라 금곰상과 은곰상을 공략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젊은 감독의 실험적인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영 포럼' 분야에는 해마다 여러 편의 우리영화가 많이 초청되고 있다. <바보선언>(이장호, 1984),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이장호, 1988), <화엄경>(장선우, 1994)등이 이 부문에서 특별상을 받은 바 있다.

    칸영화제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베를린영화제는 1951년에 창설되었다. 미국대표부 공보처의 영화당당관으로 일하고 있던 오스카 마테이(Oscar Martay)의 제안과 여러 해에 걸친 주도적인 노력으로 1950년 가을 영화제 창설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51년 6월 6일 첫 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초대위원장에 알프레드 바우어(Alfred Bauer)가 선임되었다.

    첫해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세 편, 프랑스,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에서 각각 두편,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이스라엘, 이집트, 인도, 멕시코, 호주에서 각 한편 등 23편이 초청되었다.

    알프레드 바우어는 1976년까지 26년간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베를린영화제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졌다.

    전후 냉전체제에서 연방정부와 시 정부는 물론 이해당사국간의 정치적 압력과 갈등을 극복하면서 소련영화(74년)와 동독 및 중국영화(75년)를 초청하고 정부와 투쟁하면서 매년예산을 확보하는 등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알프레드 바우어는 1986년 75세에 별세했고 그를 추모하여 1987년 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마련, 영화예술에 공헌한 사람에게 개막식에서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제2대 집행위원장은 언론인출신의 볼프 도너(Wolf Donner). 그는 매년 6월에 개최되던 영화제를 1978년부터 칸영화제보다 앞당겨 2월말에서 3월초로 변경한 후 칸영화제와 국제영화제작자연맹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3년만에 사임했다.

    뒤를 이어 발탁된 제3대 위원장이 로카르노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있던 모릿츠 데 하델른(Moritz de Hadeln).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다시 발탁되었지만 그도 2001년 제51회 끝으로 22년만에 베를린영화제를 떠났다.

    모릿츠 데 하델른은 재임 기간 중 영화를 통한 동서 양 진영의 화합과 대폭적인 예산증액은 물론 특히 영화제본부를 신시가지인 포츠다머광장으로 옮겨 그 면모를 일신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2000년 새로 옮긴 베르리나레 팔라스트극장에서 50주년 영화제를 끝낸 직후 그는 연방정부와 시의회로부터 해임통보를 받게 된다.

    1970년 베를린영화제안에 '영 포럼' 부문을 부인과 함께 창설해서 31년간을 운영해 오던 울리히 그레고르(Ulrich Gregor)도 동반 퇴장했다.

    그 뒤를 이어 제4대 집행위원장으로 부임한 사람이 바로 디이터 코스릭(Dieter Kosslick)이다. 디이터 코스릭은 1948년 생으로 뮌헨에서 커뮤니케이션, 정치, 교육학을 전공한 후 대학조교, 함부르크 시 공무원, '여성 평등을 위한 연대' 대변인, 잡지기자 등 다양한 경력을 거치다가 1983년에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주로 영화기금에서 일해 왔다.

    함부르크영화기금의 책임자(83-92), 유럽영화배급기구(EFDO)의 창설 및 대표, 그리고 1992년 North Rhine-Westphalia주의 수도인 쾰른에 본부를 둔 독일 최대의 영화기금 'Filmstifting NRW'의 책임자로 부임, 8년간 이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천성적인 외교관 기질을 갖고 있으며, 다변(多辯)에 재치가 있다.

    디이터 코스릭과 나와의 인연은 2001년 새로 부임한(실제로 2002년 영화제부터 주관) 그를 부산영화제에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역시 같은 해 취임한 칸영화제의 티에리 후레모는 세 차례의 만남을 통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베니스영화제의 새 집행위원장인 모릿츠 데 하델른도 직접 만나서 부산영화제의 방문을 부탁했지만 안면이 없었던 디이터 코스릭은 오랫동안 영 포럼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도로시 베너(Dorothee Wenner)여사에게 부탁했다.

    모두 2001년에 부임한 그 첫해에 세 사람 모두 흔쾌히 수락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 함께 참석한 것은 기적이다. 디이터 코스릭은 영 포럼의 새 디렉터인 크리스토프 테르헤히테(Christoph Terhechte), 파로라마 부문의 책임자인 빌란트 스펙(Wieland Speck), 프로그래머인 제이콥 왕과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고 그는 도착하자마자 베를린에 북한영화를 초청해도 좋은지 자문을 구하고 2003년부터 젊고 재능 있는 영화인들을 약 1천명 초청해서 영화제 기간에 워크숍을 개최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적격자를 선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물론 체제하는 기간 중 폭탄주도 함께 마시고 와이드 앵글 파티에서 함께 춤도 췄다.

    영화제가 끝난 직후 나는 유럽영화아카데미가 주최한 영화제정상회담에 초청을 받고 베를린, 베니스, 선댄스, 토론토, 산세바스쳔, 카를로비바리, 로카르노와 로테르담(칸이 불참함에 따라 추가로 초청) 등 8대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함께 참석했다.

    5백 여명의 전 세계 영화인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유럽영화아카데미 부회장인 디이터 코스릭은 회의를 주재하면서 부산국제영화제를 극찬한 후 부산에 같다온 답례로 한국영화 한편을 다음해 2월에 열리는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리겠다고 공언했다. 그 영화가 바로 김기덕 감독의 <나쁜남자>였다.

    디이터 코스릭은 다음해인 2002년에도 부산을 찾았으며 작년 칸 영화제에서는 영화잡지 버라이어티가 베를린, 베니스, 토론토, 선댄스, 뉴욕 등 아홉 명의 집행위원장들을 초청한 패널 토론회에도 나와 함께 참석했다. 영 포럼의 울리히 그레고르 후임으로 위촉된 크리스토프 테레헤히테는 말이 별로 없는 조용한 청년이다.

    영화 저널리스트로 함부르크 저예산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1997년부터 울리히 그레고르 밑에서 베를린영화제 영 포럼 부문의 영화선정작업을 해왔다. 이런 인연으로 울리히 그레고르와 부인 에리카 그레고르는 퇴임한 후에도 영 포럼에 직, 간접으로 일을 맡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편 본선인 파노라마부문의 책임을 맡고 있는 빌란트 스펙은 매우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다. 베를린 자유대학(Freie Universitat Berlin)에서 독일문학, 드라마, 민족학 등을 전공했고, 비디오, 영화, 출판업계 등에서 남성운동 및 동성연애자들의 정체성에 중점을 두고 활동해 왔으며 몇 편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다.

    베를린 독립예술영화전용관 '탈리'(Tali)의 사무국장, 비디오 다큐멘터리, TV시리즈, 영화 등의 감독, 작가,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등 그의 경력은 다채롭다. 그러다가 1982년부터는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일하다가 1992년에 파노라마 부문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오랜 기간 영 포럼 부문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도로시 베너는 함부르그대학에서 독일문학, 역사, 언어학을 전공하고 1988년 이후 베를린에서 프리렌서 영화제작자로, 아시아지역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베를린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를 선정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녀가 제작한 <10인의 외국인이 본 독일>은 작년 부산영화제에 초청 상영된바 있다.

    베를린영화제의 유럽영화마켓(European Film Market)의 책임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고 있는 베키 프로브스트(Beki Probst)여사도 베를린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주요 스태프의 한 사람이다.

    일본과 중국을 편애했던 데 하델른 이후 베를린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디이터 코스릭사단이 한국영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그 전망은 밝다.

    내년에 임권택 감독 특별전을 기획하고 있고 아직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가 올해 경쟁에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에 과연 한국의 봄은 다시 찾아올 것인가. 기대해 본다.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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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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