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25 [칼럼니스트] 2004년 1월 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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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에 게시판이 없다면

지난 달 말 인터넷 게시판에 청와대의 한 비서관을 음해하는 허위사실을 반복적으로 게재한 50대 남자가 검찰에 구속기소됐었다. 죄목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상 명예훼손」이었다.

이 남자가 받고 있는 혐의는 지난 11월 모 언론사와 한 시민단체의 인터넷 게시판에 "청와대 A비서관이 모 그룹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게재하는 등 지난 10월말부터 11월초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A비서관을 음해한 일이다.

대필작가로 활동 중인 이 남자는 2002년 1월부터 각종 사이트에 특정인사에 대한 비방성 글과 각종 정치이슈에 대한 의견 등을 약 3백차례에 걸쳐 게재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네티즌들과 교류하며 글을 올리는 재미에 취해 허위사실까지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고 검찰은 전했다.

이 정도의 취미(?)라면 전문가들이 말하는 「게시판 중독증」에 속한다. 인테넷상의 게시판에 무엇이든 써야 하며, 주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비방하거나 비난하는 글쓰기를 연속적으로 한다면, 게시판중독증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인터넷공간에는 수많은 홈페이지가 존재하고 있다. 각 홈페이지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방문자를 위한 게시판이 마련돼있다. 이들 게시판에는 온갖 내용의 글이 올라온다. 이상하게도 남을 비난하는 등 부정적인 내용이 더 많은 것이 게시판의 현주소이다. 익명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생각을 멋대로 털어놓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의견을 달리하는 네티즌의 반격이 뒤따르는데, 사안에 따라서는 서로가 벌떼처럼 상대방을 마구 공격하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그래서 "게시판문화를 올바르게 가꾸자"라든가, "댓글저널리즘을 확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심할 경우 게시판의 분위기는 험악하거나 문란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도 「홈페이지의 꽃」이라고 불러도 좋을 게시판이 없다면 그야말로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근 들어 인터넷게시판에 올려진 글 때문에 우리들의 흥미(?)를 돋우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어제(8일)는 서울 사립 명문대학의 시간강사인 김모씨(46)가 실명을 써서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교수 신규임용과 연구비지원을 둘러싼 교수들의 비리행태를 고발하는 글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교수들의 실명까지 밝히면서 "이 교수는 자신이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한 한 연구 프로젝트에서 학술진흥재단이 규정하고 있는 3백만원만 받아야 하는데도 강사들의 인건비를 가로채 1천만원을 수령했다"고 주장하고 "모 대학 교수인 자기 부인을 프로젝트 신청 당일 연구자 명단에 집어넣었다"고 폭로했다. 이 정도라면 파문이 일고도 남을 만하다.

이에 대해 해당교수들은 "연구원들의 동의와 합의를 얻은 다음 연구소 운영을 위해 일부 돈을 모은 것을 개인적 착복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교수 사회의 「관행」으로 미루어 볼 때 김씨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음해라고 보기는 어렵다.

TV방송사 게시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며칠 전 인기 방송작가 김수현씨가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주인공인 김희애씨가 방송사 연기대상에서 중요한 상을 받지 못하자 본인의 홈페이지(www.kshdrama.com)에 「2003 SBS 연기대상」 시상결과를 비판한 글을 올렸다.

김씨는 "상이라는 것은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 상은 상이 아니라 쓰레기 배급에 지나지 않는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김씨의 글은 네티즌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 올려진 것으로 마치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렇게 되자 더욱 강경해진 네티즌들은 "수상자들을 선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거나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는 등의 글로 해당 방송사 게시판을 도배질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올해 61세의 할머니(?)인 김씨가 젊은 네티즌의 속성과 파워를 잘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의 「2003 SBS 가요대전」에서 대상에 가수 이효리가 선정되자 납득하기 어렵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SBS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졌다. 방송사의 예능총괄CP인 장모씨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이효리는 올해 가장 주목받은 가수였다"면서 "연기를 잘하는 탤런트,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만이 최고의 스타는 아니다"고 반박했다. 세상을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필자로서는 궤변에 가까운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대통령과 관련한 루머 입밖에 낸 경찰청 특수수사과 소속 여경간부가 좌천됐다는 소식은 어이없는 경우에 속한다. 그 여경은 지난달 17일 청사 내 커피숍에서 동료 여경 8명과 담소를 나누던 중 시중에 떠도는 노 대통령 사생활 관련 소문을 소개해 물의를(?) 빚은 잘못으로 지난 2일 남대문경찰서로 발령이 났다.

강경위가 한 말의 내용은 아무 신빙성 없는 "카더라"수준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12월 24일 밤 이 내용을 「나라사랑」이란 ID로 「현직 경찰관의 말(대통령이야기)」이라는 제목과 함께 청와대 자유게시판에 올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 내부에서조차 "잡담 수준을 가지고 좌천 발령까지 내린 것은 청와대 눈치를 너무 심하게 본 것"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한편 "경찰은 검찰의 시녀"라면서 조직을 비판했던 글을 경찰청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파면 당했던 차재복 경사(40)가 대법원까지 가는 송사 끝에 승소했다는 소식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판결의 취지는 「게시판에서의 언론자유」를 인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판결로 2001년 9월 파면된 이후 2년4개월만에 당시 근무처였던 금정경찰서에 복직할 수 있게 됐다니 다행이다.

「게시판에서 생긴 일」에는 이런 것도 있다. 지난 5일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의 홈페이지 게시판인 「할 말이 있어요」라는 코너에 북한측이 항의문을 게재한 일이다. 어떤 형식이든 남한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북한측이 글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박의원은 지난해 10월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통해 남측 자금이 북측에 흘러들어 갔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조선복권합영회사 측이 그 동안 가만있다가 이날 "박원홍 의원은 매달 40만달러, 연간 5백만달러 이상이 우리 사이트로 입금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사이트의 월간 평균 입금액은 4만달러가 되지 않고 매출이익도 1만달러에 못 미치는 적자"라며 "어떤 근거로 그런 산출이 나는지 답변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게시판이 아니었다면, 네티즌들이 이런 글을 보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다.

홈페이지의 게시판이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게시판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고, 언로를 활짝 열어 젖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무책임한 비난과 비방하는 분위기만 사라진다면 인터넷게시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없이 좋은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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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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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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