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79 [칼럼니스트] 2004년 10월 1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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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라

이강룡 / 웹칼럼니스트 http://readme.or.kr

중국 고전에서는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그대로 전하는 것을 전의(傳疑)라고 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B라는 내용의 글을 썼을 때 B가 아니라 명백히 C인 것 같을 때에도,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경우엔 ‘A는 C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A가 B라고 얘기했다.’ 라고 그대로 전하면서 ‘하지만 나는 C라고 생각한다.’ 라고 덧붙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다른 경로를 통해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은 원전을 훼손 없이 접하면서도 잘못됐을지도 모르는 부분에 관한 정보까지 아울러 습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앞선 연구자에 대한 존경과 후학을 위한 배려가 담겨 있는데, 무엇보다도 전의의 가장 큰 목적은 원전의 훼손을 방지하고 진실의 왜곡을 막는 것이다. 이는 어떤 정보가 여러 전달 매체를 거치면서 사실이 축소, 확대, 왜곡되는 것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A랑 B랑 사귀는 것 같아.’ 라고 누군가 내게 얘기해줬는데, 나는 이를 다른 이에게 ‘A랑 B랑 커플이래.’ 라고 전하고, 이를 들은 이는 ‘A랑 B랑 결혼한다며?’ 라고 부풀리곤 한다.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다. 당사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는데 여러 단계를 거치며 전혀 엉뚱하게 와전되어 논쟁을 벌이거나 당사자를 인신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전의는 학술적인 목적에서 생긴 것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 속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전의는 정보 전달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보통 단행본에는 다른 단행본이나 창작물의 일부를 인용한 글이 실려 있곤 하는데, 이 인용 부분을 다시 인용할 경우 정보 매개체로서의 단행본 출처를 생략하고 직접 해당 작품 출처를 명기한다면, 전의의 취지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실수나 잘못이 개입됐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정보를 습득하는 경우 정보 습득 당사자는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정보를 전달 받았는지 밝혀주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블로그 hof.pe.kr에 실렸던, '~via(경유지 정보)를 활용합시다.' 라는 글은 전의의 취지에 부합하는 주장이었다. 어떤 사이트를 링크하는 경우 정보를 습득한 최초 경로를 함께 표시하면 원전에 대한 훼손 방지는 물론이고, 사실 왜곡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원전에 대한 확인을 병행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미리 기사 내용을 다 만들어 놓고 취재원과 취재 정보를 형식적으로 활용하여 취재 의도에 꿰맞추는 기자들의 행위를 종종 목격한다. 이 과정에서 때로 취재원의 말과 글을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분적으로 짜깁기하여 활용하기도 하는데 정보 전달 방법에 있어서 전의와는 그야말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운이 좋은 경우 사실과 부합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진실의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씨를 남긴다. 논리학에서 삼단 논법의 오류는 흔히 제1가정의 오류이기 쉽다. 첫 번째 명제가 정확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따른 추론은 의미가 없다. 어떤 사건의 최초 전달자로서의 기자가 전의의 의도에 반한다면 이런 정보(기사)가 다른 매체 - 신문, 방송 기사를 받아 싣는 포털 사이트 같은 - 혹은 독자를 통해 또 다른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모 포털 사이트에 ‘올림픽 선수단은 8월 31일 오후 4시에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었다.’ 라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 기사가 송고된 시각은 오후 2시경이었다. 종이 신문에 실릴 기사가 온라인을 통해 먼저 게재되는 특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행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 환담을 나눌 예정이다.’ 라고 쓰면 충분하지 않은가. 1%의 가능성에 기대어 ‘~카더라’ 기사를 쓰는 것과, 99%의 가능성에 기대어 예측 기사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행위다. 명백히 전의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전의의 방법을 취하면서 충분히 본인의 주장이나 의견을 덧붙일 수 있다. 만일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거나 논거가 불충분할 경우에는 의심나는 그대로 원전을 전하면서 이에 관해 논평하거나 부연한 다른 이들의 의견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재미없는 기사’ 가 될지언정 ‘나쁜 기사’는 되지 않는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블로그나 카페나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블로그 같은 개인 홈페이지들을 살펴보다 보면, S태그 ( 이 태그를 사용하면 글자 중앙을 가로지르는 선이 그려짐, 해당 부분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는 html 태그 )를 활용하여 최초 작성 문구와 수정 문구를 병기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꽤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전의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원래 전의를 할 때는 원문의 오탈자까지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옳지만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한다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글을 작성했을 때 누군가 내 주장의 잘못된 논거나 사례를 지적했거나 혹은 나중에 본인이 깨닫는 경우 이를 활용하여 수정 전/후 정보를 함께 명기한다면 본인을 위해서도, 다른 독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내가 실수한 것은 다른 이들도 실수할 수 있는 법이고, 이런 경험을 서로 나누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 전의의 취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쉬울 것이다. 의심나는 것이 있다면 의심나는 그대로 전해야 하며, 혹 명백히 틀린 정보라는 확신이 들더라도 바로잡은 정보만을 전하지 않고 원전을 함께 명기한다면 이 정보를 접하게 되는 다른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며, 전의의 취지에 충실한 웹 문서들이 늘어난다면 웹의 신뢰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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