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62 [칼럼니스트] 2004년 9월 1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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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해외여행(7) 이탈리아 폼페이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2000년 긴 잠에서 깨어난 '꿈의 도시'

해마다 바캉스 시즌이면 고대도시 폼페이(Pompei)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에 위치한 폼페이는 산과 강, 바다를 끼고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휴양지다. 2000년 긴 잠에서 깨어난 '꿈의 도시'로 이탈리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계 10대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이다.

나폴리는 로마에서 160㎞. 서울에서 대전 가는 거리와 비슷하여 고속버스로 1시간 30여분 걸린다. 폼페이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항구도시 나폴리도 둘러볼 만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스파카 나폴리 거리는 지저분하고 교통은 엉망이다. 오토바이 폭주족이 클랙슨을 누르며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피크닉의 명소였던 보메르 언덕은 불량청년들과 실업자들로 득실거린다. 그러나 세계 3대 미항(美港)답게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펼쳐진 쪽빛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은 변하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는 23㎞, 관광버스로는 지척의 거리다. 폼페이 유적지에 도착하면 한국어로 된 안내서적을 구입하는 것이 폼페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매표소 옆 안내소에서 영자로 된 안내책자와 유적지 지도를 무료로 주니 꼭 챙기자. 지도에는 1시간 반, 3시간, 6시간 관광코스가 구역 번호와 함께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서기 79년 번영의 절정기에 잿더미로

폼페이 최후의 날은 '소(小) 프리니우스의 편지' 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폼페이를 덮칠 때 소 프리니우스는 로마제국 미세눔 해군사령관인 아버지 대(大) 프리니우스를 따라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 시민들을 구하러갔다. 그때 목격한 현장을 2통의 편지로 남겼다.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 폼페이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 시민·귀족 1만2000명과 노예 8000여명이 잿더미에 묻혔다. 화산재에 묻힌 지하도시가 폼페이란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겔만. 그는 1755년 서재에서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다 '소(小) 프리니우스 편지집'을 발견하고,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는 곳이 바로 로마시대 폼페이임을 확신했다. 폼페이는 잊혀진 채 1600여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었다. 1710년, 농부 한 사람이 우물을 파다 우연히 금붙이장식장을 발견한 것이 폼페이 '발견'의 단초가 됐다. 그 후 일확천금을 노리는 떠돌이, 고대보물에 흥미를 느낀 왕족과 귀족들이 앞다퉈 몰려 무분별하게 파헤쳐졌다.

찬란했던 헬레니즘문화의 타임캡슐

폼페이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이 발견됐다. 초기의 무책임한 발굴은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폼페이 발굴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틀을 갖춰 진행됐고, 발굴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폼페이는 동서로 길게 누운 계란형 도시다. 나폴리만과 이어진 서쪽지역이 중앙대광장. 주피터 신전과 함께 공공건물이 들어서 있고, 동쪽 끝에는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원형 경기장이 위치해 있다.

3㎞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폼페이에는 8개의 문이 있다. 2000년전 큰돌로 포장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마이나 문을 통과하게 된다.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종교·경제·시민생활의 중심이었던 중앙대광장이 나온다. 아폴로, 주피터 신전을 비롯, 상품거래와 재판장소로 활용했던 바실리카 등 공공건물들이 밀집해 있고, 중앙대광장 오른쪽은 상가와 시장이다.

어느 시인은 "정복된 그리스가 정복자인 로마를 문화적으로 정복했다"고 언급했듯이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그리스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로마의 신(神)들마저 그리스 신을 그대로 모방했음을 폼페이의 신전과 건축양식에서 엿볼 수 있다.

중앙대광장을 나와 둘러 볼 곳은 스타비아 공중목욕탕. 대기실 바닥은 하얀 대리석을 쪼개 모자이크식으로 꾸며 놓았고, 안마실, 탈의실, 미온탕, 열탕과 함께 천장에 홈을 파 증기가 스미도록 한 사우나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다. 목욕탕 천장 중앙과 동서 쪽 3면에 비스듬히 유리를 끼워 태양열 난방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밖에도 포룸 욕장, 화산폭발 당시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중앙욕장, 호화스런 개인 주택들의 욕장 등 도시 전역에 욕장이 산재해 있어 요즘 서울의 대형 사우나와 찜질방을 방불케 할 정도로 목욕문화가 발달했다. 목욕장 부근엔 목욕 후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술과 음료를 마시던 바(Bar)가 자리잡고 있다.

스타비아 공중목욕탕을 나와 오른쪽으로 연결 된 길을 따라가면 폼페이에서 가장 부상(富商)이었다는 베티 형제의 대저택이 나온다. 현관 오른쪽 기둥에는 한 남자가 자신의 성기와 돈 보따리를 저울로 다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벽화는 일종의 상술이었다고 한다. 처음 거래하러 오는 사람이 벽화를 보고 웃으면 술과 여자로 접대했고, 찡그리면 돈으로 매수해 상거래를 했다는 상술이 놀랍다. 분수와 함께 남근을 과장하게 표현한 청동·대리석 조각들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은 당시의 부(富)를 상징하고, 회랑으로 연결되는 각 방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을 가늠케 한다.

향락과 퇴폐의 극치…신의 분노인가

베티 형제의 집을 나와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포르투나의 길. 맞은 켠 작은 골목에 커다란 맷돌과 방앗간·반죽기계·오븐이 갖춰진 빵집이 보인다. 당나귀로 큰 맷돌을 돌려 밀을 갈았다니 우리의 연자방아와 비슷하다. 부근 바에 묻혀 있는 돌 항아리는 포도주와 음료수 등을 차게 보관하던 곳으로 냉장고 기능을 했다.

아우구스탈리의 길 왼쪽으로 돌아가면 통행이 많았던 번화가로 돌 바닥엔 마차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연이어 사창가라는 의미의 루파나레의 길이 나온다. 관광객들이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이다. 사창가와 함께 여관, 세탁소, 약국 등이 있던 골목이다.


사진 : 폼페이 유곽(遊廓)지구 2층 벽에 양각해 놓은 남성성기 조각

사창가 건물 2층 벽에는 남성의 성기 조각이 돌출 되 있어 눈길을 끈다. 안으로 들어가면 5개의 작은 방들 벽에는 열렬한 포옹과 다양한 체위를 담은 낯뜨거운 프레스코 벽화들이 남아 있다. "나는 하루 00명의 손님을 받았다"는 낙서도 보인다. 맞은 켠은 여관과 고객들이 마차를 보관하던 곳이다.

베티 형제의 집 조각과 그림, 사창가의 춘화는 폼페이가 환락의 도시였음을 의미한다. 호화 공중목욕탕과 원형극장, 상가와 숙박시설, 음식점과 술집, 윤락가 시설까지 고루 갖춰 향락문화가 헬레니즘문화와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폼페이가 번영의 절정기에 화산의 폭발로 잿더미에 묻혀버린 것을 두고 향락과 쾌락에 대한 신의 분노라는 평가도 있다. 어떤 학자는 폼페이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최고로 타락하였던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기도 했다.

도로, 상·하수도 등 완벽한 계획도시

이어서 만나는 도로가 아본단자의 길. 동쪽의 사르노 문에서 서쪽의 마리나 문까지 연결되는 길로 폼페이 상업중심지역이다. 조각가·보석 세공가·공구제작자들의 가게뿐 아니라 무기제조공장, 양모와 가죽공장도 있어 고대인들의 생활을 짐작케 한다. 지나쳐온 루파나레 길 반대편 작은 길로 접어들면 대극장과 오데온 소극장으로 이어진다. 조금 더 내려가면 1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원형경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옆에 사각형으로 된 검투사의 막사가 있다. 요즘도 여름철이면 이곳에서 오페라와 발레 등이 공연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씨도 이곳에서 연주한바 있다.

폼페이를 둘러보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완벽한 계획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우리 농촌엔 상수도시설이 미흡한 데 이미 2000년전 폼페이는 집집마다 상수도가 공급됐다. 돌로 포장된 도로 밑의 하수시설도 완벽하다. 더구나 사람과 마차가 서로 다른 길을 다니도록 도로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붉은 벽돌 건물의 구조적 아름다움과 화산폭발과 지진에도 끄덕 없이 원형이 보전된 건축의 건실함도 놀랍다.

집집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마당이 있고 아름다운 그림의 벽과 천장, 각종 조각품과 생활용품들은 당시의 문화수준을 짐작케 한다. 폼페이 문화의 핵심은 상업도시라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아 로마식의 강건함과 화려함을 더한 헬레니즘문화를 만들어내고 꽃피웠다는 데 있다.

폼페이 유적을 제대로 보려면 나폴리에 있는 국립 고고학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을 들러봐야 한다. 폼페이에서 발굴 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싸움'이라는 모자이크그림이 유명하지만, 일반인들의 관심은 '비밀의 방', 또는 '성애의 방'이라고 불리는 전시실이다. 성(性)과 관련 된 그림, 조각품들로 꾸며놓은 방엔 성교장면뿐 아니라, 그룹섹스, 동성애, 수간(獸奸) 그림까지 다양하다. 미성년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예약제로만 들어갈 수 있다.

■ 여행쪽지

▲ 폼페이는 로마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볼 수 없는 것이 흠. 배낭여행의 경우 나폴리 중앙역에서 국철을 타고 폼페이 역에서 하차. 소요 시간 약 20분, 역에서 유적지까지 도보 7분 거리. 또는 나폴리 중앙역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사철(私鐵)을 타고 미스터리 역에서 내리면 편리하다. 도보 2분 거리. ▲ 유적지는 오전 9시부터 일몰 전까지 개관. 찬찬히 보려면 나폴리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가는 것이 좋다. 폼페이를 둘러 본 뒤 나폴리 국립 고고학박물관을 들러야 이해가 쉽다.

- 월간 <광업진흥> 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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