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57 [칼럼니스트] 2004년 9월 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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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텃밭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글 품을 파는 틈틈이 소일거리 삼아 옥상에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텃밭이라야 스치로폼이나 화분에 흙을 담아 꽃과 고추, 수세미와 조롱박 등을 심고 돌보는 일이죠.

아파트 베란다에서 흔히 키우는 영산홍이나 군자란, 산세베니아, 로즈메리 등 바다 건너온 식물보다는 원추리, 나리, 개불알꽃, 매발톱꽃 등 야생화가 더 살가워 애착이 갑니다. 어렸을 적 시골의 산야를 누비며 많이 보았던 우리 꽃들이기 때문이지요.



흐드러지게 피던 영산홍과 쐐기꼴형의 잎새사이로 자주 빛 꽃잎을 피우던 매발톱꽃이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꽃잎을 떨구고 나면, 개불알꽃이 야생화의 근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꽃불을 밝힙니다. 어는 식물학자는 개불알꽃이름이 점잔하지 못하다며 '복주머니꽃'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하지만 해학적이고 소탈하여 오히려 정감이 갑니다.

원추리가 여름 내내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며 꽃말처럼 근심을 털어 내는가하면 나리꽃도 뒤질세라 화려한 꽃술을 드러냅니다. 짙은 향기를 뿜어내던 박하도 여름의 끝자리에 접어들자 솜털 같은 꽃을 피워 앙증맞습니다.

옥상에 푸른 울타리 구실을 해주던 옥수수 몇 그루, 수세미와 조롱박 넝쿨도 무성하게 자라 한 여름 푸른 그늘을 만들어 주더군요. 아침에 물을 줄 땐 샛노란 수세미 꽃과, 수세미 넝쿨에 더부살이하는 나팔꽃이 아침인사를 하고, 저녁이면 조롱박꽃이 하얀 미소로 반깁니다.

몇 년 전 서울 종로5가 거리꽃시장에서 사다가 화단에 심은 머루는 2층 옥상까지 기세 좋게 줄기를 뽑아 올리며 주렁주렁 머루를 매달아 여간 신기한 게 아닙니다. 산자락 한 폭을 옮겨놓은 느낌이거든요.

상추를 뽑아 낸 자리에 심은 고추는 올해 유난히 무성합니다. 이른봄 고춧잎에 진딧물이 생겨 살충제를 뿌릴까하다가 잎 뒤쪽에 붙은 진딧물을 손톱으로 죽이는 소탕작전을 펼친 결과 검푸르게 자라 이웃에 나눠 줄만큼 푸짐하게 열립니다. 갓 따낸 풋고추를 된장에 듬뿍 찍어 찬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보릿고개 시절 고향의 정경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해지더군요. 그 시절엔 오이냉국에 밥을 말아먹어도 더위가 가시는 듯했지요. 가을과 함께 고추가 빨갛게 익으니 마음에도 붉은 물이 듭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정을 흠뻑 쏟아야 구김살 없이 밝게 자라듯, 꽃이나 식물도 봄이면 흙 갈이를 해주고, 가을엔 퇴비를 넣어주며, 병충해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비료도 적당히 주고 물을 자주 줘야 싱싱하게 자라더군요. 회색 빛 도시에서 꽃을 찾아 날아든 벌과 나비도 반갑습니다.

'그린도시 만들기 운동'에 동참한다는 거창한 뜻은 없습니다. '도심 속 오아시스'니 '하늘정원'이니 하는 수사도 사치로 들립니다. 꽃이나 식물을 가꾸다보니 게으름도 줄고, 녹색의 싱그러움을 집안에 끌어드리니 마음이 절로 푸르러집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도시민들이 서울 근교 주말농장을 찾거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주말농장을 가꾸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흙 냄새를 맡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땀흘려 직접 무공해 채소를 길러 먹는다는 것 자체가 웰빙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 아니겠습니까. 부모를 따라 주말농장에 다녀 온 아이들은 작물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것 조것 물어 보거나 식물도감을 펼쳐본다고 합니다.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지요.

요즘은 자기에게 분양된 땅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웃 땅의 잡초도 뽑아주며 상부상조한다니 두레문화가 살아나는 것 같아 더욱 흐뭇합니다. 땀흘려 가꾼 채소를 이웃과 나눠 먹으면 그 자체가 나눔의 삶이자 행복이지요. 땀을 흘린 만큼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자연과 가까워지는 만큼 마음이 넉넉해지기 때문입니다.

텃밭과 주말농장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자신의 크기 만한 마음의 텃밭이 있지 않습니까. 그 텃밭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면 꽃피고 열매 맺듯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살이도 텃밭을 가꾸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들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한숨입니다. 경제는 무기력증에 우울증이 겹쳐 신음하고, 물가가 치솟는 만큼 살림살이는 더욱 움츠려듭니다. 직장생활도 맘 편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지요. 살아가기가 아무리 팍팍해도 삶의 고비마다 용케도 희망이라는 나무가 버팀목 구실을 해주기에 견딥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파랗고 겨울엔 하얄 것'이라는 동요처럼 파란 희망의 씨앗을 뿌리면 초록의 그늘을 드리워 주고, 하얀 희망의 씨앗을 뿌리면 하얀 꽃을 피우기 마련입니다.

지난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찜통더위, 밤이면 열대야에 시달려 고통스러웠습니다. 아침저녁 부는 소슬바람 속에 가을이 묻어나고 가을빛이 그리움처럼 어른거립니다. 한 여름 무성하게 자란 고통과 미움의 억센 풀을 걷어내고 이 가을 마음의 텃밭에서 꿈의 원형을 일궈 내십시오.

- 농수산물유통공사 사보 <유통>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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