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27 [칼럼니스트] 2004년 7월 1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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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아직도
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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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힘들어 못 살겠습니다. 어디 가서 말도 할 수 없고..." 언젠가 택시에서였다. 또 정치판 아니면 불경기 타령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손님은 이해하실 것 같아 그렇다'고 전제를 하면서 운전자는 이야기를 풀어 갔다. 내 나이 등을 묻고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다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6.25전쟁이 터졌고 그 와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집은 거덜이 나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별의별 일을 다 해가며 고생했으나 이제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게 되었고 자식들도 잘 자라 제 앞가림 정도는 하게 돼 큰 불만 없이 산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라면 이 나라 국민치고 겪고 듣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터라 별 흥미를 갖지 못하고 듣는 체하다가 더 길어지기 전에 막는 것이 좋겠다 싶어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그런데 뭐가 그리 힘들어 못살겠다는 말씀이세요?"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 자기 같은 이들이 대놓고 말도 못하고 고생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게 '그 빌어먹을 꼬부랑글씨'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중퇴이니 한글은 큰 불편이 없고 한자도 좀 배웠으므로 그럭저럭 헤쳐 나갈 수 있는데 꼬부랑글씨만 만나면 앞이 콱 막힌다는 것이다. 일일이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며 나날을 살아가기가 여간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기 경험에 따르면 60년대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70년대 이후 꼬부랑글씨 물결이 거세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꼬부랑글씨를 한글로 표기하니까 뭔지는 몰라도 읽기는 했는데 근년에 들어와서는 아예 알파벳이 그대로 나오는 통에 죽겠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그게 대수냐 하겠지만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장님이나 마찬가지라니까요. 6.25 때문에 교육기회를 놓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장애인이 된 거예요"

사회 곳곳에서 그 운전자처럼 그때 입은 상처를 자식, 사위, 며느리들에게 말도 못하고 앓는 이들이 숱하다. 그들이 말을 못하고 있으므로 6.25는 과거의 일로 묻히고 그 상처는 깨끗이 아문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당시 전쟁과 가난으로 대부분 중학진학은 엄두도 못 냈고 고교이상은 한정된 계층에나 가능했다. 초등학교 중퇴자도 흔했다. 식모 등 남의집살이를 가는 여학생들을 위해서 5학년이상의 중퇴자들에게는 졸업장을 학교에서 나중에 만들어주는 눈물겹고 고마운 사례도 많았다. 큰 문제가 없는 한 대학까지 예사로 진학하는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겠지만 그 때는 그랬다.

2,3년 전 어느 문화센터 한문반에서 있었던 일이다. 20여명이 수강하는 반인데 어찌하다가 영어얘기가 나온 끝에 60대 주부가 이왕이면 영어도 좀 가르쳐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강사가 그 곳에는 이미 영어 기초반, 회화반 등도 있는데 그걸 들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자 그럴 형편이 안 돼서 그런다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런 반에 가려면 중학이라도 나와야 가능하지 자기들처럼 알파벳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문반이긴 하지만 자기들을 위해서 틈틈이 알파벳이라도 좀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아니 애원이었다.

강사는 그 사정이 너무 딱해 한자 시간을 조금 쪼개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단어들도 하나 둘씩 가르쳐 서너 달 뒤에는 그 양이 상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 하고 난 뒤 수료식 때 그들은 이제 완전 장님은 벗어났다며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했다. 한문 강사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각자가 그렇게 된 사정들을 얘기했는데 앞의 택시 운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연들이었고 가슴 속 깊이 묻혀있는 한이었다. 6.25의 통증은 그들을 평생 동안 쑤시며 괴롭혔다. 전쟁과 가난으로 못 배운 것이 무슨 죄냐고 자위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무정한 세태는 그들을 위로하고 돕기는커녕 따돌리고 비웃는 것 같았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어느 주부는 대단한 부유층이라서 부러울 것이 없는데 손자들이 뭘 들고 와서 묻다가 대답을 못하면 '할머니는 이런 것도 몰라'할 때 죽고 싶었다며 펑펑 울었다.

교육기회를 잃은 이들에게 늦게나마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원이나 성인교육기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해당자들이 쉽게 접근할 만큼 많지 않고 또 개개인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 선뜻 시간과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리고 딱한 사정을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불편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다.

참혹했던 6.25의 상처 가운데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들은 그런대로 많이 아물었다. 전쟁 후 세대는 그 흔적을 거의 감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 운전자처럼 인생의 흐름이 비극적으로 바뀌어 버린 개인들의 상처는 잠복되고 미봉되었을 따름이지 결코 치유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난 54년을 그 상처 때문에 힘들게 살아왔고 가슴 깊은 곳에 멍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웃듯이 외래어 물결은 날이 갈수록 높고 거세지고 있다. 애들이 먹는 과자에서부터 생활필수품 대부분의 이름까지 외국어로 뒤덮이고 경쟁력 제고라는 이름아래 기업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공기관마저 영어이름으로 바꾸는 판이다. TV, 신문 등 언론도 뒤질세라 외래어 범벅이고 로마자가 아예 생으로 나온다.

웬만큼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걸 헤쳐 나가기 힘들 정도이다. 택시 운전자의 말처럼 초등학교 졸업이하의 학력을 가진 이들은 그 파도에 익사할 지경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직도 6.25를 앓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남몰래... 전쟁 때문에 못 배워 외면당하며 기죽어 살아온 나 같은 사람들의 한은 죽어서도 쉽게 안 풀릴 겁니다"

- <지방행정 7월호> (20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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