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19 [칼럼니스트] 2004년 6월 2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 |
울림이 있는 홈페이지를 위하여

이강룡 / 블로그 'readme 파일' 운영자 http://readme.or.kr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읽어본 이들에게는 이 글이 바슐라르에 대한 일종의 ‘반역’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슐라르를 아직 읽지 못한 이들에게, 그에게로 가는 작은 첫번째 징검다리가 되고 싶은 소박한 기대감으로 이 글을 쓴다. 또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바슐라르를 읽게 될 이들에게 내 글이 행여 바슐라르 읽기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
“집을 인간의 영혼에 대한 분석도구로 생각함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 가스똥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민음사 )


네티즌의 글쓰기(말하기)와 홈페이지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바슐라르의 이 두 가지 선언에 힘입은 바 크다. 블로그를 비롯한 다양한 개인 매체와 글쓰기 도구의 다양화로 인해, 네티즌에게 글쓰기란 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 됐고, 블로그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홈페이지가 생기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홈페이지는 개인의 사상적 분실(分室)로서, 때론 정보의 저장소로서, 때론 타인과의 교류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홈페이지나 홈페이지로서의 블로그를 탐구한다는 것은, 정녕 ‘집’에 관한 성찰을 전제할 수밖에 없고 ‘공간’으로서의 집에 관한 몽상을 바슐라르와 함께 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공간의 시학>에서 말하는 시인은 이 글에서 운영자이거나 블로거가 되며, 집은 홈페이지로 치환될 것이다.

‘울림’이 있는 홈페이지가 인터넷에 반향을 일으킨다.

바슐라르가 세계를 만나는 방식은 반향과 울림이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 삶의 다양성에 미치는 방식이고, 울림은 자신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본인을 포함한 타인의 목소리와 글을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글을 말한다. 울림만 있는 삶도, 반향만 있는 삶도 상상할 수 없다. 네티즌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존재로서의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집 안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집 또한 우리들 안에 있다.
비어 있는 서랍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생각할 수만 있는 법이다. ( 같은 책, 113쪽 )


가냘픈 돼지를 상상할 수 없듯이, 비어 있는 홈페이지, 찾아오지 않는 블로그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들이 홈페이지 안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홈페이지 또한 우리들 안에 있을 것이다.

반향의 다양성은 존재 차원에서 울림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 같은 책, 90쪽 )

인터넷이 다양성의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실 개개의 웹사이트나 네티즌의 독창성이 모였다는 의미인데, ‘독창성’이 있다고 불릴 만한 홈페이지에는 ‘울림의 통일성’이 있다. 진지한 성찰과 일관된 철학이 담겨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방문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독특한 힘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퍼온 글만 잔뜩 모아둔 홈페이지에서 ‘울림’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슐라르는 세계를 부정하는 첫 번째 지점으로서의 ‘구석’, 집의 구석을 이야기한다. 구석이란 반은 벽이고 반은 문인 장소이다. 집의 한 쪽 구석에서 세상을 반쯤 바라보며 처음으로 집 밖의 세계를 사고한다. 개인 홈페이지는 어떤 면에서 인터넷의 모든 구석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확정하고 싶어하고, 존재를 확정함으로써, 정체성을 세움으로써 세상의 모든 상황들을 제시하고 싶어한다. 이 쪽 구석에서 저 쪽 구석으로 향하면서, 안에서 밖을 보면서 세상과 소통한다. 그렇다면 이를 응용하여, 이렇게 선언할 수 있다.

‘진솔한 울림이 담긴 블로그가 인터넷의 저쪽 구석에 있는 블로거에게 반향을 일으키리라.’

홈페이지와 다락방의 기억

‘인간은 어머니의 태반 속 같은 평화로움과 안락을 추구한다.’ 이 한 문장이 <공간의 시학>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혹자들은 이를 요나 콤플렉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 속에 있다고 해도 조개껍질 속 같은 원초의 아득함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현상학자의 기본적인 작업이다. ( 같은 책, 114쪽 )
이젠 다락방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다락방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 같은 책, 123쪽 )
권태의 중심들이, 고독의 중심들이, 몽상의 중심들이 한데 모여, 우리들이 태어난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추억들보다 더 지속적인 꿈의 집을 형성한다. ( 같은 책, 132쪽 )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은신처를 찾고, 만들어낸다. 은신처란 타인으로부터 나를 숨기는 목적이라기보다는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아늑하게 내 세계로 침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들은 유년 시절 은신처로서의 다락방, 은신처로서의 지하실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고 누구나 그 경험을 사랑한다. 언제나 과거는 기록이 아닌 경험으로만 기억되는데, 자료를 백업할 때 가장 중요시되는 건 문서의 이동이 아니라, 사실 경험을 보존하고 싶은 욕구일 것이다. 다락방에 관한 경험의 기억처럼. 네티즌에게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는 일종의 경험의 은신처가 된다. 은신처로서의 내 홈페이지에 갖는 애착은 바로, 회사 웹사이트가 홈페이지였던 회사원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PC를 켰을 때 개인 홈페이지가 첫 화면으로 뜰 때의 안도감과 다르지 않다.

지하실과 연결된 층계는 우리에게 언제나 내려가는 것으로 상상된다. 위층의 침실로 가는 층계를 우리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붕 밑 다락방으로 가는 층계는 항상 올라가는 층계이다. ( 같은 책, 143쪽 )

홈페이지가 다락방인 것은, 홈페이지를 찾을 때의 경험만이 기억으로 남을 뿐이고 홈페이지를 나올 때의 경험은 별다른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홈페이지는 다락방이며 은신처이다. 최근 블로그 운영자들간의 오프라인 모임이 활발한데, 오프라인 모임이 즐거운 것은 모임에서 그들의 안식처, 피난처, 그들의 다락방에 관한 기억을 나누기 때문일 것이다. 다락방을 나의 은신처로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다락방을 -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 오른다. 포털 블로그나 무료 계정 홈페이지 이용자들은 종종 원치 않는 광고나 공지 등으로 이 작업에 방해를 받고, 내 다락방을 치장(디자인)하는 데에도 제약이 따른다. 은신처로 만들기엔 제약이 너무 많았다. 내가 설치형 블로그를 선택한 까닭도 이 지점에 있었다.

내 홈페이지의 램프는 어디를 밝히고 있나?

램프는 결코 바깥에서 불을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틈을 통해 바깥으로 새나올 수 있을 뿐인 갇힌 불빛인 것이다. ( 같은 책, 153쪽 )

‘갇힌’ 불빛이란 거리를 밝히는 불빛이 아닌 집 안을 밝히는 빛이며, 때로 오랜 기다림의 표지이기도 하다. 내 블로그에 글을 남길 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혹은 많은 방문자를 기대하는 목적으로 글을 쓴다면 램프가 아닌 가로등이 필요할 것이다. 내 홈페이지의 램프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밝히고 있나?

다락방을 만들고 싶어하는, 다락방의 기억과 경험을 만들고 싶어하는 블로거들에게, 정녕, ‘집’의 시학, <공간의 시학>을 권한다.

바슐라르가 인용한 ‘꽃은 언제나 씨 안에 있다.’ 라는 유명한 구절처럼, 당신의 홈페이지, 당신의 블로그가 언젠가 꽃이 될 것이다. 당신이 쓰는 글 당신의 페이지 속에 꽃씨가 있다. 만일 당신의 홈페이지가 꽃이 되어 활짝 핀다면 바슐라르의 이 말이 홈페이지 운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때로 집은 커지고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집에서 살려면, 한결 더 유연한 몽상이, 한결 덜 명확히 그려진 몽상이 필요하다.”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를 평가해 주십시오.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