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14 [칼럼니스트] 2004년 6월 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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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5]
북한의 단군릉은 사기다


홍 순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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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 북한에서는, 김일성주석의 지시에 따라 평양시 근교의 대박산에 있던 단군묘로 알려진 옛무덤을 발굴했다. 이 해 9월, 주석은 이 곳을 찾아 '단군릉'을 세울 것을 지시한다. 1994년 7월 주석은 이 현장을 다시 방문하여 '단군릉 최종 형성안'에 서명했다. 방문한 이틀 후 주석은 사망하고, 김정일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이 해 10월 '단군릉 개건(改建) 준공식'을 가졌다.

이 당시 남한의 일부 학자들은, 옛무덤의 축조 형태가 고구려식이며, 출토된 금동 왕관 조각과 관에 사용한 못이 단군 시대의 것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 북한에서는, 단군 시대에 만들어진 묘를 고구려 때 개축(改築)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대응했다.

다른 주요 쟁점은 옛무덤에서 발굴했다는 86개의 뼈조각이었다. 북한은, 이 뼈를 '2개의 연구 기관에서, 전자상자공명연대측정법으로 각각 24회, 30회씩 측정한 결과, 그 연대가 5011년 전이며 오차는 +-267년'이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대해 남한 학자들은, 그 공명측정법은 적어도 5만년 이상 된 뼈나 유물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5011년 전을 부정했다.

여기서 납득키 어려운 것은, 같은 측정법으로, 뼈란 같은 시료(試料)로, 왜 54회나 측정했느냐는 것이다. 현대 고고학의 수준은, 뼈뿐만 아니라 여러 시료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동형 반복이란 고지식한 방법을 썼다는 것은 상식밖이다.

모든 의문점을 북한의 주장대로 인정한다 해도, 그들은 결정적인 논리의 모순을 저질렀다. 그것은 뼈의 연대가 5011년 전이기 때문에, '단군과 그 부인의 뼈'라고 확정한 것이다.

이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5011년 전에 단군이 살았다면, 다른 사람들도 살았다. 금동 왕관의 조각도 마찬가지다. 그런 조각으로 만들어진 관을 다른 왕이나 왕족들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북한은 86 조각의 뼈가, 남녀 2 사람의 뼈라는 것을 밝힌 것처럼, 그 남자가 단군이라는 것도 입증했어야만 했다. 5011년 전의 뼈가 모두 단군의 뼈일 수 없고, 그 시기의 뼈가 묻힌 무덤이 모두 단군의 무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5011년 전, 오차 +-267년은 북한이 인용하고 있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 연대와도 맞지 않는다. 즉, 위의 연대를 서기로 환산하면, B.C.3285년에서 B.C.2751년 사이다. 이 때는 이른바 배달국(또는 단국) 시대로, 제7세 거련과 제13세 사와라란 통치자가 살았다. 어느 책에나 똑 같이 기록된 B.C.2333년의 단군왕검은 살지 않았던 때다. 따라서 공명측정법은 이런 책들에 쓰여져 있는 단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옛무덤에 묻혔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이다.

북한은 단군릉을 만들면서 2 가지의 정당성을 쳐들었다. 하나는 위에 쓴 뼈고, 하나는 1936년에 지방 유지들이 옛무덤 앞에 세웠던 단군 기적비(紀蹟碑)다. 이 비를 현재 단군릉 앞에 옮겨 세웠다.

그런데 1936년이라고 해야 6-70년 전으로, 그 때나 지금이나 몇 천년 전을 보는 시대적 위치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방대한 사료(史料)를 아무나 볼 수 없었던 일제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과거에 대해 무지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역사를 보면, 단군 기적비는 단군릉에 붙인 한낱 사족(蛇足)에 불과하다.

고려 시대는 신의 세상이라 할 만큼 불교를 비롯한 종교 관계의 기록이 많다. 그럼에도 고려 중기 이전까지 단군에 관한 어떤 내용도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고려사'에는 적혀 있지 않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단웅, 단인, 단군 천왕(天王)을 삼성당(三聖堂)에 모셔 민간에서 숭배했다는 내용이 여러 책에 실린다.

단군을 국가가 공인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건국 후 30여년 지나서다. 세종 11년(A.D.1429년)에 '비로서 단군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과 합사(合祀)했다'고 한다. 함께 제사만 지냈을 뿐, 이 때까지 단군의 무덤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 그 후 200년이 넘는 동안도 마찬가지다.

숙종 때인 A.D.1697년에 별안간 단군 '묘'(墓)란 표현이 나온다. 그 후 50여년 지나 영조가, 단군, 기자와 3국의 시조 능묘를 수축(修築)하라고 지시한다. 그 뒤를 이은 정조 때인 A.D.1786년에도 단군묘를 수리하고, 묘를 지킬 호구(戶口)를 뒀다.

1936년의 단군 기적비는, 2-300년 전인 이 때의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때의 기록도 몇 천년 전의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시기적으로 지금과 근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록이, '부로(父老)가 언전(諺傳)' 즉 '동네 늙은이들이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이라는 불확실한 내용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조선 정부는 단군묘를 문화재 정도로 취급했던 것이지, 단군묘의 실체를 인정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 묘사가, '연대가 멀고 믿을만한 문헌도 없어서 제사는 지내지 못하더라도, (무덤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목축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A.D.1786년에 정조가 지시한 것이다. 즉, 단군이란 신(神)에게는 사당에서 각가지 격식을 갖춰 국가가 제사를 지냈지만, 시체가 묻혀 있다는 묘에서는 신빙성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옛적부터 신선이 되어 형체가 없다고 믿어 왔던 단군이, 지금 그 모습을 단군릉에서 생생히 드러냈다. 그가 우리 앞에 나타난 목적을 역사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이씨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 세대 정도, 고려를 청산하고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몰두한다. 이 작업이 웬만큼 마무리되자 왕조의 정통성과 영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단군을 이용했다. 같은 목적으로, 조선 건국으로부터 600년이 지나, 김씨들이 단군을 모셔 온 것이다.

-200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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