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02 칼럼니스트 2004년 5월 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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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그리고 5.18


임 영 숙 (서울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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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이후 첫 외부행사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광주와 탄핵을 이렇게 연결했다. '지난 3월 촛불시위를 TV로 보면서 선진 민주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평화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되 민주적인 행동도 포기하지 않았던 5.18 광주의 전통이 국민 가슴속에 살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 '5월' 또는 '광주'로 그냥 표현되기도 하는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대장정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80년대 운동권을 지배하는 화두였던 '광주'는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다시 지난해와 올해의 시청 앞 광화문 촛불시위에 보통 사람들을 참여시킨 숨은 동력이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이를 '너 지금 그 자리에 있는가'란 물음으로 압축한다. 민주화 투쟁이전에,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의 자리에 지금 참여하고 있느냐는 준엄한 질문이다. 2004년 3월12일 국회의 대통령 탄핵 역시 1980년 5월 광주처럼 일어나서는 안 될 국가적 불행이었지만 한국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국회의 탄핵안 가결에서 헌재의 탄핵기각 결정에 이르기까지 63일간은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어둡고 긴 터널이었으나 전화위복의 결과를 안겨 주었다. 무리한 대통령 탄핵은 우선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했다. 평화적인 촛불시위와 별다른 혼란 없이 국회 판갈이를 이뤄낸 총선은 시민사회의 성숙과 함께 민주주의 주체는 국민이란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 헌법적 질서와 체계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법치주의가 확립됐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법의 결정에 승복하는 훈련을 온 국민이 제대로 받으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한 셈이다. 헌재의 탄핵기각 결정문은 특히 헌법의 존재와 헌재의 중요성을 각인 시켜주었다. 교과서에 실린 추상적 개념으로만 기억돼 온 헌법과 삼권분립의 정신이 일상속의 구체적 사실로 가슴에 와 닿게 했다.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은연중 무시되기도 했던 헌법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만들었다. 대법원과 비교돼 한때 헌재 무용론이 제기된 적도 있지만 탄핵기각 결정문은 딱딱하고 난해한 판결문에 익숙한 이들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만큼 명문장이었다. 결정문을 낭독한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의 얼굴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인 대통령이 헌법을 경시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임을 서릿발 같이 지적했다. 그러나 쉽게 망각하는 우리 국민이 탄핵을 통해 얻은 법치주의의 교훈을 얼마동안이나 기억할까.5.18기념식장에서 한나라당 지도부가 비표 없이 검색대를 통과하려다가 제지당하자 거칠게 항의했다는 것은 사소하고 경미한 일이지만 그 교훈이 아직 행동을 바꿀 만큼 체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광주'와 탄핵은 민주화와 법치주의의 길을 열었다. 민주화의 대장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듯이 법치주의 또한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탄핵의 교훈을 쉽게 잊지 말고 법치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 고위공직자와 정치인, 일반국민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부터 헌법을 다시 읽고 법치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면서 습관적인 위법행위들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법정기일 내에 처리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예산안이나 지구당 폐지 문제 등만 해도 국회의원들의 법의식수준을 보여준다. 소수의견 공개 여부로 논란이 된 헌재법 36조 3항을 비롯 탄핵심판 과정에서 드러난 법률적 미비점 등을 정비하는 기술적 보완도 시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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