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90 [칼럼니스트] 2004년 4월 1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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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세계가 인정한 문화 유산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 한국인의 지혜 /판소리

세계문화유산 된 '인류의 보물'

"아이고, 아부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불효여식 심청이가 살어서 여기 왔소. 아버지, 눈을 떠서 저를 급히 보옵소서. 아이고, 아부지." "아니, 심청이라니? 청이라니? 이게 웬 말이여? 에이? 이게 웬 말이여? 내가 지금 죽어 수궁을 들어왔느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난 내 딸 청이, 이 곳이 어디라고 살어오다니 웬 말이냐?"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

영화 '서편제'의 압권은 한적한 포구 주막에서 만난 의붓 남매가 소리와 북으로 정한을 풀어내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 때 송화가 부른 판소리가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으로 애원성 짙은 소리에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소리꾼의 삶을 통해 우리소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서편제'는 판소리의 대중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는 놈은 발가락 빨리고, 똥누는 놈 주저앉히고, 제주(祭酒)병에 오줌싸고, 새 망건 편자 끊고, 새 갓 보면은 땀 때 띠고, 앉은뱅이는 택견, 곱사동이는 뒤집어 놓고, 봉사는 똥칠 허고, 애 밴 부인은 배를 차고…." <흥부가 중 놀부 심술부리는 대목>

욕심 많은 놀부가 심술을 부리는 대목이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고 괴롭히는 놀부의 심술이 기가 막힌다. 그러나 심술이 해학과 풍자로 변주되어 듣는 이들의 배꼽을 잡게 하는 자진모리 장단의 흥겨운 대목이다. 판소리는 이와 같이 민중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이어 온 민중예술이다. 판소리엔 우리 민족의 한(恨)과 정(情), 멋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소리꾼과 고수, 청중이 어울리는 민중예술

판소리의 '판'은 무엇인가. 굿판, 춤판처럼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한)판으로 짜여진 노래'라고 풀이하는 것이 더 옳다. 판소리에 대비되는 말로 '토막소리'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꾼(唱者)이 고수(鼓手)의 북 반주에 맞춰 극적(劇的)으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소리(歌)'와 '아니리(말)'와 '발림(몸짓)'을 통해 전달하는 전통공연예술이다. (한)판 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소리꾼은 슬플 때는 우는 시늉을 하고, 흥겨울 때는 춤을 춘다. 뱃노래가 나오면 노 젓는 시늉을 낸다. 이런 동작을 '너름새'라 한다. '발림(몸짓)'도 비슷한 용어로 쓰인다. 소리로만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말로 사건의 변화, 시간의 경과, 작중 인물들의 대화, 주인공의 심리묘사, 작중 인물 등을 전달한다. 이를 '아니리'라 한다. 오페라의 리치타티보(Recitativo·敍唱)나 스피치와 비슷하다. 스토리를 소리와 연기와 사설로 혼자 소화해내는 1인 오페라 격이다.

소리꾼이 갖춰야 요건으로 신재효는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들고 있다. 소리꾼은 배우적인 자질을 갖춰야하고, 판소리 사설은 문학적인 요소를 구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득음과 너름새는 연극적인 요소를 강조한 것이다. '정승 나기는 쉬워도 명창 나기는 어렵다'는 속담처럼 명창이 되기란 쉽지 않다.

고수가 소리꾼의 장단만 맞추고 앉았다면 얼마나 단조롭겠는가. "얼씨구", "좋다", "잘헌다", "그렇지", "아먼" 등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운다. 추임새를 잘해야 소리꾼이 지쳤다가도 금방 힘을 얻는다. 지난해 소리무대를 저승으로 옮긴 박동진 명창은 즉흥 대사와 걸쭉한 육담(肉談)으로 유명하다. 놀부처럼 심술이 고약하거나, 뺑덕어미처럼 못났다면 그 비유를 "고수 같다"고 하여 청중을 웃겼다. 인간문화재 고수에게도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고 호통을 치면 고수는 "그려"하고 응수한다' 그러면 또 "눈 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 구먼"하고, 고수는 "소리만 잘 혀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하고 되받는다. 고수의 추임새는 흥을 돋우는 조미료다.

청중은 소리만 듣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가. 서양식 음악회라면 당연히 숨죽이듯 앉아 감상을 하면 된다. 판소리는 그게 아니다. "얼씨구" "잘헌다" "그렇지"하는 추임새로 하나가되어 즐긴다. 그래서 판소리는 흔히 '일 청중, 이 고수, 삼 명창'이라고 할 정도로 청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판소리의 공급자인 소리꾼과 고수만 있으면 무엇 하는가. 듣는 소비자가 있어야 흥이 나고 판이 어울린다. 이 말은 곧 판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청중들을 위해서 판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대로 된 청중에 의해서 판소리의 소리판은 완성된다.

■열 두 마당 중 다섯 마당만 불러

영조 30년(1754년) 문인 유진환이 판소리 춘향가를 듣고 쓴 '만화본 춘향가(晩華本 春香歌)'가 판소리 문헌 중 가장 오래됐다. 이를 근거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천시했던 판소리를 양반들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300여년 전부터 판소리가 민중예술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조 때 서울 출신으로 춘천부사 병조참판 도승지를 지낸 신위(1769∼1845)가 지은 '관극시(觀劇詩)'에 권삼득과 모흥갑의 '소년 득명'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 윗대 명창 우춘대를 격찬하고 있다. 또 순조 때 사람 송만재는 아들의 등과를 자축한 잔치를 베풀고 판소리 열 두 마당을 기록한 '관우희(觀優戱)'를 펴냈다. 명창의 효시를 권삼득(1771∼1841)으로 치고, 생존연대를 추측해보면 판소리의 역사는 200여년이 된다. 어쨌든 판소리는 200∼300년 전부터 불리어 졌음을 알 수 있다.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요즘은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등 다섯 마당만 불린다. 불리지 않는 일곱 마당은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무숙이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전' '옹고집타령' 등이다. 변강쇠타령은 사설이 음탕하고 저속하다고 잘 불리지 않다가 80년대 초 박동진 명창이 마지막으로 불렀다.

판소리를 동편제니 서편제니 부르는 까닿은 무엇인가. 판소리가 퍼지고 세련돼 가는 과정에서 음악 어법에 지역적인 차이가 나고 이것이 유파를 형성하게 됐다. 이를 대가름 또는 '제(制)'라고 한다. 동편제(東便制)는 전라도 동북지역인 남원 구례 순창 흥덕 등지에서 전승되어오던 것으로 순조때 송흥록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집안에서 지속적으로 다듬고 세련되게 만들어 내려온 소리다. 송흥록 이후에는 송광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으로 전해졌다.

'서편제(西便制)'는 전라도 서남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로 주로 보성 광주 나주 등지에서 많이 불리어졌다. 이 소리제의 명창으로는 철종 때의 박유전에서 출발하여 이날치 김채만을 축으로 한다. 그밖에 정창업 김창환 김봉학으로 내려오면서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동편제가 웅건청담한 우조(羽調)에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다면, 서편제는 애틋한 '계면조(界面調)'에 부드럽고 기교가 뛰어나다. 이밖에도 중부 금강지역의 중고제, 문경새재를 분수령으로 한 석화제, 서울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에 퍼진 경제소리 등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판소리의 장단이다. 판소리에 쓰이는 장단은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엇중모리 등이 있다. 여기서 '모리'라는 것은 '머리' 또는 '몰이' 라고도 하는데 '몰아간다'라는 말에서 왔다. 진양조는 가장 느리고 완만한 박자로 한가롭고 비통하고 하염없는 대목에 주로 쓰인다. 중모리는 판소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장단으로 의연하고 안정감을 준다. 한 소절에 6박자씩 2소절로 1음 구절을 이룬다.

중모리 보다 빠른 중중모리는 우아하고 화려한 정경과 명랑한 심경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자진모리는 상황을 길게 나열하는 경우나 사설이 극적으로 긴박함을 나타내는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8분 음절 12박자로 1소절이 1음 구절이다. 가장 빠른 장단인 휘모리는 흥분과 긴박감을 나타내는 대목에 많이 쓰인다. 춘향가 중 신관사또부임 대목,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이 휘모리장단이다.

■세계무형문화유산 걸작으로 선정

한평생 소리꾼으로 외길을 걸으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만정 김소희 명창(1917∼1995)은 1972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를 공연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영화 '서편제'에 구음으로 출연하는 등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심청가의 한 대목에 구음을 붙여 개작한 소리 '떠나가는 배'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주었을 정도로 판소리의 세계화에 끼친 공로가 크다.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안숙선 명창 또한 해외순회공연을 통해 판소리의 우수성을 지구촌에 알렸다. 프랑스 신문에서는 안숙선의 소리를 '천상의 목소리'라고 격찬했다. 독창적인 판소리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느낌으로 통한다.

판소리의 우수성은 유네스코가 지난해 11월 세계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한 것으로도 입증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종묘제례악이 선정된 이후 두 번째 쾌거다. 우리 전통문화의 세계 무대 진출을 다시 한번 튼 셈이다.

판소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 평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와 이념에 대한 세계인들의 이해와 수용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세계인이 인정한 판소리에 깊은 애정과 함께 계승 발전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판소리는 청중을 위해서 존재하고, 청중에 의해서 소리판은 완성된다. 국립극장에서는 11월까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완창 판소리'를 무대에 올린다. '귀 명창'이 되어 추임새를 넣는다면 흥겨운 판이 될 것이다.

<디지털 포스트 2004년 5월호> / 이규섭 칼럼니스트·'판소리 답사기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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