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81 칼럼니스트 2004년 4월 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홈) |

주민등록번호 입력은 이제 그만!


이 재 일
http://columnist.org/netporter

필자가 어렸을 때인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어른들이 도민증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시대가 하도 어수선한 때인지라 불심검문이 많았었다. 그럴 때 도민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일단 수상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경찰서로 연행되는 일이 허다했다.

성년이면 반드시 갖고 다녀야 하는 도민증은 196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다가 1968년 5월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 없어지고, 「주민등록증」으로 바뀌었다. 발급대상은 만18세 이상의 국민이었다, 개정 주민등록법은 병역사항과 특수기술사항을 신고사항으로 규정했다. 이때 처음으로 생긴 것이 12자리의 주민등록번호이다.

그때만 해도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는 일이 의무사항은 아니었다.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필자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는데, 민간인과 구별할 수 있도록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주민등록증을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 당구장이나 중국음식점 같은 곳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맡기면 외상도 해줄 정도였다.

주민등록증의 발급이 의무화된 것은 1970년 주민등록법을 다시 개정하면서였다. 개정법은 18세 이상의 모든 주민등록자들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것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고 하여 처벌하는 규정은 없었다. 1975년에 이루어진 3차 개정에서 주민등록증 발급대상자의 연령을 17세로 낮추면서 주민등록증 발급 의무를 부과했다. 이에 따라 시행규칙도 함께 바뀌면서 주민등록번호가 현재와 같은 13자리 체제로 변화했다.

1977년에 이루어진 4차 개정에서는 세대별 주민등록표 이외에 개인별 주민등록표가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주민등록증에만 지문을 찍었지만 새로 생긴 주민등록표에는 지문을 비롯한 개인의 신상정보가 빠짐없이 기재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등록증의 발급통지를 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1년 이상 발급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벌금이나 구류를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벌칙규정도 도입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민등록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성년이 되면 누구나 주민등록을 한 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일은 당연한 의무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주민등록법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고, 설사 그런 뜻을 갖고 있다고 해도 군사정권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었다.

현행 주민등록법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안 된다. 1996년 金泳三 대통령의 문민정부 당시 스마트카드 도입을 추진할 때 공식적(?)으로 문제점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인권침해」라며 거세게 반발하자 현재와 같은 플라스틱 주민카드로 형태가 변경됐다. 이 플라스틱 주민카드는 2000년 6월부터 전면 사용됐으며, 이후 구 주민등록증은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이때의 10차 개정에서는 주민등록법 자체에 「지문」이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삽입함으로써 지문날인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정부의 스마트카드 발급 계획을 놓고 “지문날인은 법적인 근거도 없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률로서 강화시켰던 것이다.

개개인에게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식별번호를 부여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워낙 인권침해의 소지가 높다보니 함부로 채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예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국가도 많다. 우리나라도 지금에서야 현행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법을 만들거나 고치려고 한다면 아마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할 수도 있다.

정부가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관리하고 있는 개인신상정보는 출생, 혼인, 출산, 사망, 주소, 학력, 혈액형, 병력 등 무려 1백41개에 이른다. 이 정보들은 본인이 사망한 이후에도 80년 동안 보존하도록 돼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이처럼 너무나 많은 개인정보가 타인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주민등록표가 아니더라도 주민등록번호 자체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주민등록번호체계는 「YYMMDD-ABCDEFG」의 13자리로 돼있다, 앞의 YYMMDD는 생년월일을 나타낸다. 뒤의 ABCDEFG에는 개인의 갖가지 신상정보가 담겨 있다. 이 가운데 맨 앞의 A는 성별을 표시한다.

BCDE는 주민등록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고향이나 본적지가 아니라 출생신고를 한 지역을 뜻한다. 우리나라에는 3천7백여 개의 읍-면-동이 있는데, 이들 각각에 4자리로 된 지역 코드가 붙어 있다. 따라서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식을 낳아 출생 신고를 했다면 두 사람의 지역 코드는 달라진다.

그 다음의 F는 출생신고 당일 그 출생신고가 해당 읍, 면, 동사무소에 몇 번째로 접수됐느냐를 나타낸다. 한 동네에서 하루에 여러 사람이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므로, 이 숫자는 보통 1이나 2이며, 커봐야 3을 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마지막 F는 「검증번호」이다. 생년월일을 포함한 앞 12개 숫자 모두를 특정한 공식에 대입해서 산출한다. 앞의 12자리 숫자가 차례로 정해지면, 마지막에 올 수 있는 번호는 하나로 결정된다. 인터넷사이트에 가입하여 ID를 만들 때 엉터리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금방 “그런 번호는 없다”고 거부하는 것은 이 마지막 번호가 공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엄청나게 중요한 주민등록번호를 남이 요구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제공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행동이다. 또한 제공 받은 측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함부로 유출시키는 일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아무나 원하는 것이 주민등록번호이고, 아무에게나 가르쳐주는 것 또한 주민등록번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꼭 필요한 사이트에 가입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결같이 주민등록번호를 원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사이트에서도 반드시 주민등록번호의 입력을 원하고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지만 마음은 불쾌해진다. 이름 없는 사이트일 경우는 행여 나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 악용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뒷맛이 찝찔해지기도 한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마치 1791년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했던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에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곳의 죄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간수의 시선이 무서워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는 사람이 나의 신상정보를 훤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을 위축시킨다. 게다가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불안감이 생길 수도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아니더라도 사이버공간을 드나들면서 남기게 되는 전자지문(Electronic Fingerprint)이나 데이터그림자 때문에 몇 개월 전의 접속정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판국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쓰고 있는 각종 전자카드도 내가 살아가는 흔적을 남기는 도구가 된다. 디지털로 기록된 나의 과거가 언제라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은 불안하다 못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참으로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접했다. 대통령 탄핵문제로 국민들, 특히 네티즌의 관심을 제대로 끌지 못했지만 정말로 중요한 소식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정보통신부가 오는 7월이나 8월부터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보도내용은 인터넷사이트에 회원으로 등록할 때 주민등록번호 대신 생년월일을 입력토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정통부의 이 같은 방침은 주민등록번호 도용사고를 막기 위해서이며, 이런 내용의 지침이 마련되면 민간업체들에게 권고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통부가 최근 4백48개 업체의 실태를 분석해 본 결과 일부 사이트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본인 확인이 필요할 경우에는 이미 사용이 활성화된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는 방안도 있는 만큼 가입허락을 이유로 굳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할 것까지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제발 정통부의 방안이 검토로 끝나지 않고 방침으로 결정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서울칼럼니스트모임
[칼럼니스트]를 평가해 주십시오.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