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78 [칼럼니스트] 2004년 4월 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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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여유 / 티베트연구가 김규현
'삶의 현(絃)' 조율하며 강촌에 산다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어린 고기 달빛과 어울려 노는 물가의 집 수리재에는 물고기가 많이 사는 데 봉숭아 분꽃을 거느린 잎 넓은 토란 위만 빼고 벽이란 벽에는 물고기가 노닐고, 마당가 물 마른 연못 위 정자의 나무 난간 깎아버린 물고기 몸통으로 바람 들랑거릴 때마다 돌멩이로 쌓아올린 탑 네 귀퉁이에 매달린 물고기 덩달아 풍경소리를 낸다./ 하얗게 칠한 해우소 벽에도 물고기 떼지어 몰려다니다 쭈구려 앉아 우울 날리는 사람 기웃댄다./ 수리재를 둘러싼 숲의 낙엽송 그 큰 키를 올려다보노라면 티베트로 그림공부 하러갔다는 이 집 주인 다정거사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다가 아 물고기로구나 그처럼 자유로운./ 그 날 나는 눈을 뜨고 잔다는 물고기와 어울려 하루를 놀았다.'<시 '수리재(水里薺)' 전문>

북한강상류 홍천강변에 수리재라 이름 붙인 집과, 집 주인 다정거사(茶汀居士)를 주제로 1998년 한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다. 어느 유명한 작곡가는 '수리재'를 테마로 거문고 산조를 작곡하기도 했다.

'다정거사'로 통하는 다정 김규현(金奎鉉·57)씨를 수리재에서 11년만에 만났다. 흙벽돌 한 장마다 물고기 그림을 그려 넣어 벽을 쌓고 들보를 얹어지은 독특한 2층 초가집은 수마(水磨)에 휩쓸리고 화마(火魔)에 할퀴어 돌집으로 바뀌었다. 물안개 곰실곰실 피어오르는 홍천강이 한 눈에 바라보이던 강변엔 숙박업소와 대형음식점이 들어서고 다리가 놓이면서 호젓한 강촌의 분위기를 망가트려 놓았다.

바뀐 것은 집뿐만이 아니다. 다정은 밭 갈며 그림 그리던 한국화가에서 티베트연구가로 집필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그는 1993년부터 양쯔강, 황허, 갠지스강과 티베트 고원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홀로 누볐다. 티베트 제국의 찬란했던 문명의 파편들을 구슬로 꿰어 세상에 알린다.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티베트 역사산책' 등 저서를 잇달아 내놓았고,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가제)'을 출판사에 넘긴 뒤 시리즈 10권 출간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티베트 제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되찾는 것이 티베트연구의 키워드가 됐다"는 설명이다.

'티베트 역사산책'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티베트 역사서라는 점, 우리가 익히 알던 실크로드말고 티베트를 통해서 중국과 인도를 오가던 길이 약 50년간 존재했다는 점, 혜초 스님 이전에도 네 명의 신라스님이 티베트를 경유하여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난 행적을 밝혀낸 것 등이 값진 열매다. 신비의 땅 티베트의 매력을 상품화시키려는 저급한 의도와는 애초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저서에는 그의 여행 체험이 녹아있어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학교와 해인불교전문강원을 거쳐 북경의 중앙미술대학, 라싸의 티베트 대학에서 수인목판화와 탕카(탱화)를 연구했다. 진주 다솔사 주지였으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효당 최범술에게 다도(茶道)와 난(蘭)을 배웠고, 의재 허백련 화백을 통해 그림의 꿈을 일궜다. 요즘은 티베트문화연구소 사이트를 열고 저술과 강연을 통해 티베트를 알린다.

다정이 홍천강변에 터를 잡은 것은 25년전. 쓰러져 가는 초가 한 채를 구입하여 집을 일구었다. 목선 한 척을 구해 황포돛대를 달았다. 별이 빛나는 밤이면 홍천강에 황포돛배를 띄우고 누워 명상에 잠긴다. 뱃머리에 부서지는 잔물결 소리에 시름을 씻고, 단소가락에 잡념을 묻었다. 물결 따라 바람 따라 흘러가는 목선은 새벽녘이면 양수리 부근까지 흘러갔다. 노를 저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면 아침이다.

아내 이승실(45)과의 만남도 남다르다. 1985년의 마지막날. 다정은 화구(畵具)만 달랑 들고 호남선 야간열차에 올랐다. 정신적으로 무척 황폐해 있던 시절이다. 그 후 1년 가까이 서·남해안 섬을 누비며 방랑생활을 했다. 여비가 모자라면 날품을 팔고, 잠자리와 밥값 대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모 여성지 공모 중편소설에 당선된 이씨는 '동심초를 부르며 섬을 떠도는 화가'를 취재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다정의 소재를 파악하던 중 어느 스님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찾아가 만났다. 다정은 취재를 거부했고, 이씨는 물러나지 않았다. "하던 대로 화첩기행을 떠나면 따라다니며 스케치하겠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내가 관여할 바 아니다." 그렇게 떠난 길 위에서 다정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이씨는 다정을 병원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했다. 그 뒤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궁벽한 강촌에 신접살림을 차린 그녀는 농사지으며 살림을 꾸려 가는 것보다 남편의 주량을 줄이는 일이 더 어려웠다고 털어놓는다. 한때 2홉들이 소주 열 댓병은 혼자 마시며 밤을 샜다는 그의 주량도 나이 앞엔 장사 없듯 많이 줄었다. 고3인 외아들 예슬이는 춘천에 유학중이다.

'다정거사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인물이다. 왕터산 자락에서 단소를 불고 있으면 신선이 되고, 홍천강 자락에서 감자를 심고 있으며 농부가 되는 변신술을 가지고 있다.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하여 어떤 분야에서도 걸림이 없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성현을 사랑하고 서민을 사랑하는 성품을 지녔다' 다정과 막역지우인 소설가 이외수의 평이다.

지난해 정월대보름 '티베트 역사산책' 출판기념회가 수리재에서 열렸을 때도 이외수는 어김없이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가수 이남이를 비롯, 화가, 교수, 기자 등 10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평소에도 철마다 각양각색의 군상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 수리재다.

우리는 손끝만 대도 고음을 내는 현악기의 현(絃)처럼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살아가기가 갈수록 팍팍해지다보니 삶의 여유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 '작은 행복'이 아니겠는가. '물고기를 닮은' 영원한 자유인 다정은 삶의 현을 팽팽하게 조이기도 하고 느슨하게 풀기도하며 여백의 삶을 조율하며 강촌에 산다.

수리재 뒤뜰에 있는 정자와 돌탑, 아틀리에와 쉼터.

- KT&G 사보 4월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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