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77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3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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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찬반 집회와 만민공동회

홍 순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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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등 신진 개화파 30여명이 결성한 독립협회는 조선 말기에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문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정부의 명령은 백성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철칙을 깨뜨리고, 조직적으로 그리고 평화적으로 모여진 민의(民意)로 독립협회가 정부를 견제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회 변화였다.

독립협회가 민의를 모운 확실한 행동이, 1898년 여러 차례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란 민중 집회를 연 것이다. 그 해 10월에 열린 집회에서는, 6개의 제안을 채택하여 고종에게 건의했다. 이것을 '헌의(獻議) 6조'라 부르는데, 그 핵심은 중추원 구성에 관한 문제였다.

중추원은 요즘의 국회와 같은 기구로, 그 권한이 광산, 철도, 차관 등 이권이 걸린 사항을 외국과 조약 체결할 때는 각부 대신이 중추원 의장의 서명, 날인을 받으라는 형태였다. 권한은 아무래도 좋았었는데, 감투가 무엇인지, 중추원 의원이 누가 되는가가 문제로 터진다.

'헌의 6조'를 낸 후 독립협회는 10월 15일 관민 연석회의를 열고, 중추원 의원의 절반을 독립협회가 투표하여 천거한다고 결의했다. 11월 2일 정부는 이 결의를 거부하고, 독립협회는 의원 25명만을 선정하여 명단을 제출토록 지시했다. 11월 4일에는 이를 모두 묵살하고 독립협회 자체의 해산을 명령한다.

이와 같이 사태가 꼬인 배경에는, 독립협회 설립 후부터 사사건건 규탄과 시정 요구를 받아 오던 정부 내의 보수 세력의 조직적인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897년 상무사(商務社)란 어용 기구를 만들고, 만민공동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물미장(勿尾杖)이란 곤봉을 찬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황국협회(皇國協會)를 만들었다.

보부상과 보수 세력이 결탁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만민공동회의 욕심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강력한 조직력을 갖춘 보부상들이, 중추원을 개설할 때 천민을 위한 하원(下院)도 함께 개설하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대부분 지식인이었으며 사회적 지위가 높던 만민공동회 측이, 아직은 민도(民度)가 낮다는 이유로 보부상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중추원 의원의 절반을 자기들이 차지하겠다고 독선을 부린 것이다.

만민공동회에 대한 황국협회의 공격은 관민 연석회의 직후인 10월 17일부터 시작된다. 보부상 300여명이 정동에 있던 독립협회 본부를 습격하여 쑥대밭을 만든다. 11월 20일부터는 종로를 근거지로 삼은 만민공동회와, 서울 마포가 본부인 보부상이 몇 차례에 걸쳐 길거리에서 대규모 패싸움을 벌였다.

12월 6일에는 종로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철로를 베고 누워 황국협회 타도를 외치며 정부를 규탄했다. 그리고 수천명이 마포로 몰려가는 도중 보부상과 충돌했는데, 이 날 사망자가 12명, 부상자가 100여명 났었다.

만민공동회가 개최된 지 10여년 후 조선은 멸망했다. 이 때 서울의 점포들은 모두 문을 닫고, 천지는 '적막강산'(寂寞江山)이었다고 당시의 한 학자가 기술했다. 최근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집회로 사회가 시끄러웠다. 이를 보면서 만민공동회를 떠올린 것은 필자 한 사람만의 생각일까?

-200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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