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76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2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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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의 추억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아픈 기억도 가끔은 추억이 된다. 보릿고개시절의 '밀서리'는 허기를 채워주던 간식이었다. 주인 몰래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 모닥불에 구운 뒤 손바닥에 얹어놓고 비비면 밀 알이 속살을 드러낸다. 껍질을 후후 불어내고 알맞게 익은 밀 알갱이를 먹으면 구수하고 달착지근하다. 생 밀을 껌처럼 씹기도 했다.

검댕이 묻은 얼굴과 입술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웃다가 주인에게 들켜 혼쭐나게 도망가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보리가 누릇누릇 익어 가는 5∼6월쯤이면 대부분의 농가는 쌀독이 비어 나물 죽과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다.

최근 굶기를 밥먹듯이 했던 보릿고개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육사 교장의 편지'가 인터넷상에서 꾸준히 조회 수를 기록중이다. 동영상으로 다시 확인하면서 코끝이 찡한 감동을 받았다. 편지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인 여러분들은 50, 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아는가?"라고 시작된다.

서독에 간호사로 파견된 어린 딸들은 시체를 닦으며 눈물을 흘렸고, 광부로 파견된 젊은이들은 하루 10시간 넘게 지하 1000m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여인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과 전국 쥐잡기 운동으로 모은 쥐 털로 만든 '코리안 밍크'의 수출 등을 적은 뒤 "간호사와 광부, 월남전 참전용사와 중동 근로자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76달러에 불과했던 1960년대 초반, 서독에 파견될 광부와 간호사의 봉급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받게 된 경위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서 이들을 만나 가난이 서러워 통곡한 이야기 등도 담고 있다.

그 시절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과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낸 기업들을 조명한 '집념과 도전의 역사 100년'(파이낸셜뉴스신문 산업부 지음/아테네)도 지난날들을 되새겨보게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 창업주들의 열정과 노력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지식을 구하자는 취지의 '신(新) 온고지신(溫故知新)' 지침서인 셈이다.

맨주먹으로 굴지의 그룹을 일군 기업인들은 때를 잘 만났거나 운이 좋아서 재벌이 된 것만은 아니다. 많이 배워서 성공한 것도 아니다. 기업가정신과 열정, 뚝심과 추진력이 성장의 동력이 됐다. 기업가들의 도전정신과 배고픔을 겪었던 국민들의 근면성과 교육열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창업주들 보다 많이 배우고, 경영 노하우를 익힌 2,3세들의 경영시대에 와서 추진동력이 오히려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고도성장시절의 정경유착, 문어발식 확장 등 방만한 경영이 빚은 후유증이 재벌해체 등과 맞물린 사회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과 세계화의 물결로 대변하는 시대적 흐름과 급변하는 경영환경도 간과할 수 없지만, 배고픔을 겪지 못한 세대들의 도전의식, 위기관리능력, 열정의 부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일수록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한국경제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정치자금 수사, 내수부진과 경기침체, 실업률 증가와 신용불량자의 급증, 유가와 국제 원자재 값 상승 등 가뜩이나 어려운 판국에 탄핵정국의 소용돌이까지 겹쳐 기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급변하는 국제 환경과 날로 심화되는 글로벌기업간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런 때일수록 CEO의 위기관리능력이 요구된다.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환경을 중시하고 휴머니즘에 입각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개개인의 능력을 결집시켜 가치를 창출하는 경영능력도 갖춰야 한다.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권위적인 리더십 보다 영감을 주는 감성적 리더십도 필요하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보릿고개시절 배고픔을 해결해준 선대기업가들의 역량과 지혜를 오늘의 지식경영에 접목하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정주영 공법(VLCC)'으로 천수만 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를 마무리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뚝심, "컴퓨터를 1t분량만큼 생산하면 3억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하지만, 반도체를 1t생산하면 무려 13억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한다"며 반도체 생산에 뛰어든 고 이병철 회장의 미래예측 투자지혜는 되새겨 볼만하다.

- CEO Report 2004.03.25

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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