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72 [칼럼니스트] 2004년 3월 2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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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여성정치 시대인가

임 영 숙
서울신문 주필
http://columnist.org/ysi

여성정치 시대에 대한 기대는 바로 한국정치의 가부장적인 틀을 바꾼다는 기대나 다름없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는 한국정치의 가부장적 틀을 가장 완강하게 만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됐다는 소식에 한 여성이 말했다. “기가 막힌다. 박정희 시대가 극복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딸이 원내 제1당의 당 대표가 됐다니…. 지난 25년 세월이 이렇게 지워질 수 있느냐. 역사의 지체(遲滯) 현상이다. ”그 자리에 모인 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곧 반론이 제기됐다.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 않으냐. 한나라당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을 ‘이태백’‘사오정’에 비유한 홍사덕 의원보다는 낫지 않으냐.”

박근혜 대표의 등장은 다양한 반응과 함께 바야흐로 한국에도 여성정치시대가 열리는가 하는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박 대표가 각종 설문조사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정치인으로 꼽혀 왔기 때문이다. 그가 한나라당의 얼굴이 됨으로써 여성 대통령 배출시기가 앞당겨질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나온다. 지난해 한 시사주간지의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는 시기로 2012년이 가장 많이 꼽혔고 조사 대상자의 88%가 ‘여성이라도 능력과 자질이 뛰어나다면’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다고 응답했다.

여성정치 시대에 대한 기대는 여성계가 올해를 ‘여성정치 원년’으로 선언하고 여성후보 추천 등 적극적인 행보를 펼치면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열린우리당의 박영선,한나라당의 전여옥,민주당의 이승희 대변인 등 3당의 대변인 자리를 모두 여성이 휩쓸고 있다.또 비례대표 50% 여성공천이 법제화됨으로써 이번 17대 총선에서 28명의 여성이 전국구 의원으로 확실하게 원내에 진출하게 됐다. 각 당이 지역구에도 24일 현재 51명의 여성후보를 공천한 상태여서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 의원이 배출될 전망이다. 지난 16대 국회의 여성의원이 지역구 출신 5명을 포함, 총 16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지방자치단체장의 3회 연임 금지로 오는 2006년 선거에서는 대부분의 현역 단체장이 출마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앞으로 여성 지방자치단체장도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여성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혼란스러운 오늘의 정치권에서 여성이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하는 조짐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이 국민적 저항이라는 역풍을 불러일으켜 지지율 급감의 위기에 처하자 두 야당이 여성을 소방수로 내세운 것은 남성들의 꼼수로 비치기도 한다. 물론 박근혜 추미애 두 사람은 남성 위주의 현실 정치에서 나름의 정치력을 인정받고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갖고 있는 만큼 이번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르면 확실한 차기 대선주자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여성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여성정치 시대가 열렸다고 아직은 단언할 수 없을 것 같다. 외신들이 “독재자의 딸이 야당 대표가 됐다.”고 보도했듯이 박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업보를 안고 있다. 여성정치 시대에 대한 기대는 바로 한국정치의 가부장적인 틀을 바꾼다는 기대와 같다.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다. 그런데 박 대표는 한국정치의 가부장적 틀을 가장 완강하게 만들었던 대통령의 딸이다. 이 사실은 특정 지역과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후광으로 작용해 왔고 이번 대표 선출과정에도 위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 대표는 “아버지는 내 삶의 모델이자 선배이고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토록 애틋한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을 박 대표는 철저히 떨쳐 내버려야 한다. 오늘의 박 대표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나라당은 물론 여성정치 시대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쓰라린 결과를 안겨줄 것이다.

-서울신문 200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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