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10 [칼럼니스트] 2003년 12월 2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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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알아서 살아야 하나

    겨울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웅크리고 있다. 겨울 나무를 바라보는 노인들의 마음은 피부에 스치는 차가운 바람만큼 시리다. 자식들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뿔뿔이 흩어져 외로움은 깊어지고, 온돌방의 온기 같은 가족의 정이 아쉽다. 그리운 것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며칠 전 환갑과 칠순을 넘긴 누님 세분이 필자의 비좁은 단독주택에 닷새동안 머물다 갔다. 시골에서 상경한 것도 아니고, 집안에 경조사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늙어도 친정이 좋다”며 묵었다. 친정부모는 타계했지만 부모를 모셨던 장남이니 친정이다. 자식들 짝 지워주고 난 뒤 외로움을 부쩍 타는 듯하다.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 눈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고향의 추억부터 며느리 사위 칭찬과 허물까지 주고받다가 까르르 웃기도하고 가벼운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부실부실 내리는 겨울비를 보며 “가랑비가 오네”하고 은근히 눈치를 주었더니 “더 있으라고 이슬비가 오는구먼”하며 우스개 말로 비껴간다. 늙어가면서 동기간의 정이 아쉬운가 보다.

    고령화 사회 노인문제 심각

    우리나라 노인문제는 갈수록 심각하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은 이미 2000년에 7%를 넘어섰다. 7년 뒤인 2010년에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어서는 고령화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2019년엔 그 비율이 14%에 달해 노인 문제가 국가전반을 압박하는 고령사회가 된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고령화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고령화사회를 준비하는 정부의 대책은 허술하고, 민간부문도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당장 끼니를 거르는 결식노인들이 수두룩한 게 이를 대변한다. 독거노인의 47%가 하루에 한끼 이상 거르고 있다. 국고로 지원되는 무료급식 서비스를 이용하는 노인은 모두 10만여명인데 정부 지원금은 2000년 이후 한푼도 늘지 않았다.

    끼니를 거르는 것도 서럽지만 우리사회에는 의외로 학대받는 노인들이 많다. 학대라고 하면 흔히 아동학대나 여성학대를 떠올리게되지만 노인 3명 중 1명은 한차례이상 학대를 경험(37.8%)했으며, 신체적 학대보다는 정서적 학대를 많이 당한다(37.3%)고 호소할 정도다. 지난해 노인학대상담센터에 상담을 의뢰한 노인 가운데 아들과 며느리 등 가정내 학대 피해를 호소한 이들이 전년에 비해 50%나 늘었다고 한다. 아직은 희미하게나마 경로사상이 남아있어 노인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은 없다지만 언어적 폭력이나 경제적 방치가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노인에게 필요한 생활비나 최소한의 용돈조차 주지 않는 것은 잔인한 방치이자 학대다.

    벌지는 못하고 소비만 하는 노인들은 불편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홀대와 학대가 늘어난다. 60세 이상 노인들은 노부모를 모시고 산 세대지만 자식들로부터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서러운 ‘과도세대’들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들이 늙었을 때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노인 학대의 1세대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니 노인 자살율이 전체인구 자살율의 2.3배에 이르러 하루에 7명 꼴로 노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효사상의 전통을 자랑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 노인이 발붙일 수 없는 몹쓸 사회가 되었는지 씁쓸하고 안타깝다.

    노인들은 학대를 받아도 자식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미워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빗나간 자식일수록 부모의 마음은 더욱 애틋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당시 중앙정부장이었던 김재규였지만, 김재규를 그렇게 만든 것은 경호실장 차지철이다. 유신정권의 실세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차지철도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가 죽자 부정축재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소문은 사라졌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자 ‘나쁜 놈’ 소리는 들을지언정 ‘도둑 놈’소리는 듣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밑바닥 삶을 택했다. 8평 짜리 아파트에 들어가 남루한 한복 한 벌만 걸친 채 교회에서 주는 1000원 자리 한 두 푼에 생계를 의존한 채 끼니를 굶어가며 궁핍하게 살다가 갔다. 그 때문에 차지철은 ‘나뿐 놈’ 소리는 들어도 ‘도둑 놈’소리는 면하게 됐다. 어머니의 고행속죄 덕이다.

    내 몸보다 더 아픈 게 자식의 아픔이다. 그게 부모다. 그래서 혼나는 자식보다 혼내는 부모의 마음이 더 쓰린 거다. 세상 어느 부모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혈연은 아름다우나 슬픈 것’이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관계, 조상과 자손의 관계, 그것은 단절되거나 철회될 수 없는 관계이기에 끝없이 사랑하고 한없이 용서한다. 다름 아닌 핏줄이기 때문이다.

    10명 중 1명 “부모노후 책임 안져”

    제 살을 깍듯 자식들을 애지중지 키웠으나 자식들은 늘 혼자 자란 듯 부모의 사랑을 망각하기 일쑤다. 자식들이 부모를 필요로 할 때는 배부르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아니다. 자식들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부모를 찾는다. 이별의 아픔을 겪거나 친구에게 배신당할 때, 사업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질 때, 병들고 지쳐 제 몸조차 추스르지 못할 때면 부모를 찾는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다른 점이다.

    보호가 필요한 노인에게는 요양시설이나 간병서비스를 해주고, 저소득 노인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인에겐 여가 및 문화생활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서비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고령화사회의 핵심과제지만 당국의 정책에 기댈 형편이 못된다.

    병들고 갈곳 없는 노인들은 늘어나고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지난 10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실버 취업 박람회’때는 단순 노무직에도 노인들이 몰려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통역이나 번역, 상담원 등 전문직종 모집 창구엔 전직 차관보를 비롯, 교수, 중소기업 사장, 고등학교 교장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상당수 몰려 노인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취업난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줬다.

    더구나 빠르게 진행되는 핵가족화와 가족해체 현상으로 노인부양은 더 이상 전통적인 효 사상에 기댈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10명 중 1명 꼴로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인 2명 중 1명은 자녀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는 등 전통적인 가족관계가 크게 바뀌고 있어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어른 공경하는 ‘치사랑’ 실천을

    노인 문제는 사회문제이기 이전에 가정의 문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예절교육이 가정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가정이 ‘사람’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전사(戰士)’나 온실 속의 왕자와 공주를 키우는 장소로 전락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거기에는 그 공동체를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건전한 윤리의식이 뿌리내릴 토양이 더 이상 축적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은 타고난 성품이라기보다 가정교육의 힘이 크다. 부모의 교육, 특히 엄마들의 효 교육이 가장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열 마디의 효의 가르침 보다 부모를 공경하는 ‘치사랑’의 실천이다. 자식들은 용돈 몇 푼으로 자식도리를 다한 것처럼 여기겠지만 노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식들의 살가운 정이다. 퇴근 후 부모의 방에 들러 “방바닥이 춥지 않느냐”며 이부자리 밑에 손을 넣어보거나, 자리끼를 챙겨드리는 작은 정성에도 어른들은 흐뭇해한다. 아이들에게 효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어른 공경을 배우게 된다.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고 싶어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논어에 나오는 말씀이다. 요즘 버전으로 풀이하면 “살아 계실 때 잘하라”는 의미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어른들을 공경하며 불우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은 훈훈하고 아름답다.

    - <서울 도시철도공사 사보 11.12월호> (200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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