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06 [칼럼니스트] 2003년 12월 2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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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행복하셨나요?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던 지난 19일 저녁. ‘퇴기(퇴직기자)’들 몇 사람이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부근 허름한 주점에서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내년 초 창간 될 지방신문사 대표이사로 취임한 퇴기의 축하자리다. 중책을 맡아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위로와 함께, 로컬신문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러 저런 기획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곁들였다.

    4050세대들의 설 땅이 좁아진 것은 ‘오륙도’와 ‘사오정’이 흘러간 유행어가 됐듯, 이젠 관심 밖이다. 38세까지 직장에서 버티기 힘들 정도로 서슬 푸른 구조조정의 칼날이 ‘삼팔선’을 겨냥하는 시대가 아닌가.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란 신조어가 취업난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요즘, 퇴기에게 일자리가 주어진 것은 행운이라며 술잔을 부딪쳤다.

    그 시각. 여의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승리 1주년을 기념하는 ‘리멤버(Remember) 1219’ 행사가 차가운 강바람을 녹이는 열기 속에 열리고 있었다. ‘노사모’와 ‘국민의 힘’ 등 지지자들의 장외집회에 대통령이 참석 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시민혁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한 현실인식이 보통사람들의 인식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우려된다.

    지난 대선에서 노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적 요구는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를 수렴해 이 나라를 질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통합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대통령이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적대적이고 이분법적 표현을 사용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노사모’가 다시 나서달라고 역설한 것은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해보다 썰렁하고 침울한 연말이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장담했던 7% 성장은 물 건너갔고, 새로운 성장 동력도 찾아내지 못한 채 저(低)성장의 덫에 걸려들었다. 청년실업률은 8%를 웃돌고, 가계 빚은 400조원을 훨씬 넘어섰다. 금융지표들은 서민들이 빚을 갚을 능력이 한계에 왔음을 알리고 있다. 360만명의 국민이 신용불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생활고에 시달린 가족동반 자살이 잇따르는 가운 데 자식을 강물에 던진 비정한 아버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민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치권은 진흙탕싸움으로 혐오감만 가중시킨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내년 총선 올인에 쏠려있다. ‘차떼기’로 돈을 받은 정치집단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손가방' 수준임을 강조하는 ‘10분의 1’논리도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오죽하면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나라 정치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폭풍우 속에서 흔들리는 배와 같다”고 지적하면서 선장과 조타수에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겠는가.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우왕좌왕(右往左往)’을 뽑았듯이 사회 각 분야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길 잃은 철새’ 같은 행태를 드러낸 한 해였다. 경제정책은 혼선을 거듭했고, 방사능 폐기물 매립장 위치 선정과 고속전철공사 하나 매듭짓지 못하고, 정책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오락가락한 한해였다.

    지난 정권의 어느 실세가 최고급 호텔에서 한끼 30만원짜리 식사를 했다는 뉴스를 보며 1,000원짜리 김밥을 말던 아주머니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임원인 현직 국회의원의 자택과 은행 대여금고에서 150만 달러의 외화뭉치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돈이 없어 심장병수술을 못한다는 어린아이의 창백한 얼굴 위에 겹쳐 우리를 분노케 한다. 전문대학을 나와 주방장으로 취직했던 한 젊은이가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 대열에 낀 것도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보통사람들의 삶은 고달파도 지난해는 월드컵 열기로 짜릿한 행복을 누렸다. 새롭게 선출된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 속에 희망찬 한해를 기대했다. 그러나 한해의 종지부 앞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신통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답답하다. 연말의 훈훈함이나 소박한 희망마저 깡그리 상실한 듯 허탈감이 밀물져 온다.

    올 한해 당신은 행복하셨나요?.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조사한 결과, 2년 전에 비해 국민의 행복지수는 크게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4050세대 등 연령층이 높을 수록 불행지수가 높았다. 그 이유는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2030세대들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은 실업난 속에 선 듯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젊은 세대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희망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닌가. 새해에는 보통사람들이 살맛 나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CEO Report 2003.12.2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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