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887 칼럼니스트 2003년 11월 1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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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 달에 한번 만나는 '퇴기(퇴직기자)'들 모임은 부담이 없어 좋다. 30년 안팎 취재 현장을 누비던 치열한 삶을 접었으니 술자리 마감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 술잔을 건네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뉴스의 가치를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되고, 편 가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 넉넉하다. 격의 없이 질펀하게 우스개를 할 수 있으니 즐겁다.

    백수 1년 차가 안된 한 '퇴기'가 그동안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와 맘먹고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자, 백수 3년 차 선배가 '화백(화려한 백수)'이라고 치켜세운 뒤, 백수도 짬밥 그릇수가 늘어야 애환을 안다고 꼬집는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백수도 백수 나름이다. 자식들 결혼시킨 뒤 등산을 하거나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여유파도 있고, 문화교실 등을 순회하며 쌓은 지식을 나눠주는 '자원 봉사파'도 있다. 아직도 삶의 멍에를 벗지 못한 채 일을 하는 '생활파'가 있는가하면, 아내의 경제생활에 기대어 여유를 누리는 '건달파' 등 퇴직후의 삶도 다양하다.

   필자처럼 낮에는 글 품을 팔고, '밤무대(심야 라디오프로 출연)'를 뛰면서 생활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밤무대' 출연도 그렇게 녹녹치 않다. 8분 안팎 방송을 위해 8시간 가까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오후 5시 못 미쳐 뉴스를 체크하는 등 작업에 들어간다. 이미 조간에 나온 사회 뉴스는 제쳐놓고 새로운 사건을 추적한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오프라인 뉴스와 온라인뉴스를 골고루 뒤진다.

   방송할 내용의 윤곽이 잡힐 무렵이면 방송사에서 연락이 온다. 오늘의 '뉴스 초점'과 '시사 토크' 주제를 알려 준다. 내용이 겹치는 뉴스는 뺄 수밖에 없다. 방송할 뉴스를 확정한 뒤 뉴스의 흐름을 정리하고, 문제점을 생각하고, 전망을 분석한 요지를 메일로 미리 보낸다. 밤 11시 TV 마감 뉴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라디오 뉴스에도 귀를 세우고 내용에 따라 볼륨을 번갈아 높이거나 줄인다. 영장발부 등은 심야에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방송 2분전쯤이면 전화가 오고, 전화기를 통해 방송진행을 듣다가 앵커와 연결한다. 글 쓰기가 본업인 신문기자가 방송을 하려면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꿔야 하고, 사투리나 격음, 경음도 삼가야 한다. 방송을 끝내고 나면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밀물져온다.

   다음날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간신문 몇 개를 들춰본다. 방송했던 뉴스가 크게 나와야 뉴스 밸류 선정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하니 긴장은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신문을 대충 훑어 본 뒤 가까운 근린공원으로 나간다. 800m 트랙을 두 번은 걷고 두 번은 달린 뒤 언덕에 올라 가볍게 맨손체조를 하면서 하루를 연다.

   이런 일상을 잘 아는 '백수 1년 차'가 왜 그렇게 빡빡하게 얽매여 사느냐, 그 나이에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핀잔을 주며 여유를 찾으라고 당부한다. 지당한 충고다. 요즘처럼 30대가 직장에서 퇴출당하고, 재취업도 '38선(38세)'을 넘기 어렵다는 판에 정년을 채웠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이가 들면서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와 재미도 누려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그동안 세상의 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퇴기가 된 후에도 이런 저런 일감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닌가 자위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삶의 틀에 스스로를 지나치게 옭아매는 것 같다.

   잠시라도 잃어버린 여유를 되찾기 위해 홀로 덕수궁을 찾았다. 고궁 근처 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절엔 해마다 가을의 끝자리면 어김없이 들렀다. 꽃잎처럼 하르르 지는 샛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너는 최선을 다했는가. 이 가을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는가"자문하며 한해를 반추해 보기도 했으나 세월의 때가 묻으면서 흐지부지 됐다.

    나무들이 옷을 벗는다. 나무의 한해살이도 인생의 축소판이다. 빈 가지에 새움을 틔우듯 젊은 날에 누구나 푸른 희망을 가슴에 싹틔운다. 무성한 여름 잎새처럼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단풍처럼 열정을 불태우다가 낙엽처럼 늙어간다. 하지만 잎새를 다 떨군 나무는 시린 하늘을 이고 긴 겨울수행에 들어가 새로운 봄을 준비하기에 낙엽은 가을의 유서가 아니라 봄의 약정서다.

   살아가기가 팍팍하다보니 정서는 메말라가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뒤를 돌아 볼 여유조차 없는 것이 직장인들이다. 열심 뛰지 않으면 쳐질 것만 같고,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퇴출당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 현실이다. 겨울의 길목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어디쯤 와 있으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화두처럼 스스로에게 던져 보자.

    - CEO Report 11월 (200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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