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876 칼럼니스트 2003년 10월 3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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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의 형식파괴

    30여년전 수습기자시험 면접 때 "정지용(鄭芝溶) 시인에 대해 아는 대로 답변하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정지용은 1930년대에 활동한 서정시인으로 6.25 때 납북됐다"는 답변만을 겨우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납북됐거나 월북한 문인들은 논문에서조차 정×용으로 표기하는 등 익명을 쓰던 시절이었다. 1988년 납북·월북작품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에야 정지용은 제 이름을 되찾아 작품집이 발간되고, '정지용 문학상'이 제정됐다.

    기자가 된 뒤 '짬 밥'그릇이 늘다 보니, 수습기자 면접시험관 자리에 앉을 기회가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시험장까지 왔다면 모두들 우수한 인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정보와 지식을 파악하는 틀에 박힌 질문대신 뜬 금 없는 질문을 던졌다.

    "화재 현장에 취재를 갔다. 기사 마감시간은 촉박한 데 현장에서 아이가 화염에 휩싸여 죽어가고 있다. 기사를 먼저 보낼 것인가? 아이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얼마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인간성을 파악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기사는 낙종하면 다음에 특종을 하여 만회할 수 있지만 하나뿐인 생명은 귀중한 만큼 아이부터 구하겠다"는 당당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도 구하고 기사도 보내겠다"는 '눈치성·봉합형'의 어정쩡한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면접시험이란 서류전형이나 필기시험에서 파악할 수 없는 잠재능력이나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려는 수단이자 취업의 마지막 관문이다. 채용기업의 60%가 '면접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면접이 취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면접시험의 중요성이야 뻔히 알지만, 서류전형이나 필기시험 합격은커녕 이력서조차 낼 곳이 없는 판에 "뚱딴지같은 면접 타령"이냐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올 하반기 취업경쟁률은 평균 87대 1로 지난해 하반기 57대 1보다 높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11명 모집에 4천234명이 몰려 385대 1의 경쟁률을 보인 기업도 있으니 작금의 '취업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실감나게 한다. 경기침체로 채용시장이 위축된 데다 기업들이 대규모 공채에서 수시 채용으로 전환하면서 취업의 문턱은 더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최고의 우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면접의 형식파괴가 눈에 띄게 늘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산악면접이다. 1차 합격자들은 새벽 6시부터 4시간 동안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서울 근교 산에 올랐다. 등산을 하면서 회사 간부들이 응시자들과 1대1로 대화를 나누고 산 정상에서 즉석 장기 자랑을 펼쳤다. 평가 항목은 체력과 창의성, 협동성이다. 축구경기를 펼친 뒤 회식을 통해 팀워크와 대인관계 등을 측정한 기업도 있다.

    국내 유명 식품업체는 4명이 한 조를 이뤄 요리 작품을 만드는 면접을 3년째 시행 중이다. "요리를 알아야 주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오너의 경영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단순 조리능력보다 똑같은 재료로 누가 창의적인 음식을 만들고 누가 요리 작품을 잘 설명하는지를 평가하는 게 주목적이다.

    또 화장품회사에서는 비발디의 '사계' 등 고전음악을 들려주며 음악감상문을 쓰라는 주문을 했고, 모 카드사는 지원자의 창의력과 자기표현력을 평가하기 위해 종이 한 장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이나 동물을 그려보라는 '그림면접'을 실시하기도 했다.

    한 제약회사는 집단면접·토론면접·개별면접·저녁식사면접 등 4단계로 이어지는'VIP 면접'을 실시했다. 응시자들에게 택시비 지급은 물론 면접 대기시간 등을 이용해 회사가 예약한 당구장이나 PC방 이용할 수 있게 배려했고, 고급 식당의 식사 등 최고 고객 수준의 대접을 해주는 한편, 다단계 면접을 통해 숨은 잠재력과 인성(人性)을 평가한다.

    모 의류업체는 지원자의 학력·성·나이 난을 없애는 대신 구직자들이 스스로 가치관과 적성·능력 등을 보여주는 2MB분량의 '자기증명자료' 파일을 받았다. 컴퓨터 문서나 동영상·그래픽 제작 같은 정보처리 능력이 주요 평가항목이다.

    면접의 형식파괴가 늘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면접평가요소다. 첫 인상과 품위 있는 자세를 평가하는 용모와 태도는 면접평가표의 단골 메뉴다. 그만큼 면접관과의 첫 대면이 중요하다. 언어 구사력과 흡인력도 파악하는 만큼 표현이 정확해야 함은 물론이다. 우물쭈물 얼버무리듯 말하면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단편적인 지식보다 유연한 사고, 상황 판단력, 창의성 등을 평가하는 만큼 취업하려는 기업의 특성에 맞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 CEO Report 10월 23일 (200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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