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871 칼럼니스트 2003년 10월 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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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만난 송율궁 청년

    지하철 열차 안 좌석에 앉아서 졸다 깨다 하는데, 뭔가 내 코 앞에 디밀어졌다. 신문 반페이지만한 흰 종이에 큰 글자로 적혀 있는 것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세상에, 송율궁이조차 팔아먹는 사람이 있군."

    그 종이에서 읽은 글귀는 "송율궁 기금을 만들겠습니다. 제가 직접 돈을 받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종이판 너머로 시선을 옮겼을 때, 잡힌 것은 분명 송율궁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순간 머리 속이 멍해져 왔다.

    십 몇 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송율궁은 피아노 연주와 현대음악 작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천재 소년이었다. 그 성공은 시각 장애를 딛고 이룬 각고의 결실이었다. 그가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맹인 아들의 앞길을 열어 주려고 애쓰던 어머니는 건강하게 살아 계실까. 구걸이나 다름없는 행위에 나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울까. 내가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있는 새에, 율궁은 벌써 몇 사람 앞을 거쳐 저만큼 가 있었다. 그 뒤 몇 사람 앞을 더 지나지만 수확은 전혀 없었다.

    역에서 열차가 멈추자 율궁 청년이 내렸다. 차창 밖으로 그의 쓸쓸한 표정이 보였다. 나는 화가 났다. 재목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사회에 화가 났고,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기회를 외면해 버린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날 강의 시간에 송율궁이란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지하철 승객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여러분, 이 청년은 작곡가며 피아니스트인 송율궁입니다. 이 청년은 어렸을 때 많은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이 청년이 작곡을 할 수 있게 도와 줍시다." 이렇게 내가 호소했더라면 도와 줄 사람이 몇 명은 나오지 않았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 봐도 송율궁에 관해서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한미르의 전화번호 검색에서도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모찬니(www.mochanni.com)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 하나는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훈화 속에서 장애를 극복한 소년의 본보기로 든 것이고, 또 하나는 2002년 8월 수해의연금으로 한국방송에 송율궁이 1만원을 낸 기록이었다.

    지하철 차칸을 돌며 도움을 침묵으로 호소하는 그가 지난해 수해의연금을 냈다는 것은 또 다른 놀람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표정이 밝던 소년 율궁과 쓸쓸한 표정으로 지하철 승강장을 걸어가던 청년 율궁의 모습이 겹쳐져 머리 속에 떠올랐다. 쉽게 의심하고 인색해지는 마음을 그가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 200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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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문
칼럼니스트, 대진대학교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http://columnist.org/par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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