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10월 20일 No. 870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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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창을 열자

    영동과 영서 지방을 잇는 대관령(大關嶺) 국도를 걸어서 넘은 적이 있다. 고교시절 여름이었다. 그 땐 먼지가 풀풀 이는 비포장 도로로 버스가 해수병 환자처럼 그르렁대며 가끔씩 오르내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지루할 뿐 아니라, 주머니 사정도 한 여름에 찬바람이 날 정도였고, 빨리 바다에 가고싶은 조바심으로 힘드는 줄 모른 채 걸었다. 도로가 확장되고 포장이 되면서 굽어 도는 에움 길을 차량들이 곡예하듯 달리더니, 대관령터널이 뚫리면서 그 길도 이제는 한산해 졌다.

    지난해 봄엔 대관령 '옛길'을 걸어서 내려갔다. 대관령 옛길 출발점은 대관령정상부근 강릉방향 반정(半程)이다. 조선시대 역마제도가 시행될 때 영서 쪽 횡계역과 영동 쪽 구산역 사이의 중간이라 하여 '반쟁이'라 불렀던 곳이다. 들꽃의 싱그러운 향기, 새 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는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까지 맑게 씻어 줄 정도로 호젓한 오솔길이다. 옛 길이 끝나는 곳엔 대관령박물관이 있어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박물관이 들어선 자리는 조선시대 때 나라에서 나그네를 위해 숙박을 제공했던 '제민원'터다. 또 강릉 들머리 왕산 부근엔 조각가 부부가 폐교를 빌려 아담하게 꾸며 놓은 조각공원이 있고, 경포대 바다로 이어져 번잡하지 않는 여행길이다.

    대관령 옛길은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세를 탄 이순원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기도하다. 아버지와 초등학생 아들이 대관령에서 강릉까지 6시간 동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줄거리다.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걸으며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가 인상깊게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걷는 그 길을 대자연이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기에 더욱 넉넉하게 느껴졌다.

    "무자식이 상팔자" 출산파업 현실화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 없다'고 옛 시인은 노래했지만, 지금은 산천도 세태도 어제가 전생으로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차량통행이 뜸해지면서 대관령휴게소와 대관령박물관은 문을 닫았고, 다람쥐가 조각품 사이를 넘나들던 왕산조각공원도 지난해 여름 수마가 휩쓸고 가버렸다. 빠르고 편하기 위해 뚫어 놓은 대관령 터널과 교각도 고개아래에서 쳐다보면 흉물스럽다.

    산천만 변한 것이 아니라 세태와 가족관계도 많이 변했다. 가족의 전통적인 역할과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 효(孝)의 개념이 사라지니 부모부양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자녀교육 또한 학교와 학원에 넘겨졌다. 이제 남아 있는 기능은 가족간에 혈연을 나누는 정도다.

    가족해체현상도 심각하다. 이혼이 늘면서 재혼가족과 편부모가족이 부쩍 늘었다. 당연히 혈연의 정(情)도 반쪽일 수밖에 없다. 자녀유학 등으로 떨어져 사는 분거가족도 많아졌다. 홀로 남은 '기러기 아빠'의 신세도 따분하겠지만,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뉴욕에 간 어머니는 '뉴욕과부'가 되어 부부는 물론 아버지와 자녀가 떨어져 산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일수록 자식들만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자식에게 온 몸을 던져 희생해왔다. 그래도 그때는 사회적 신분상승이 그나마 수월했던 시절이어서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고생한 보람을 안겨주었다. 요즘은 부모가 가난하면 대를 이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해간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에 육박하고 있으니 가난의 세습이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에서 밀려난 4050세대 가장뿐 아니라 지갑이 얇아지는 월급쟁이들은 가난이 자식에게 대물림될까봐 두렵다.

    이제는 아예 아이를 낳지 말자는 무자녀가족의 확산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가 됐다. 우리나라 정책 중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든 산아제한 정책만큼 실효를 거둔 정책은 드물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며 아들선호를 경계하던 표어가 나온지 불과 10여년만에 출산장려정책을 펴야 할 정도로 '출산 파업'이 현실화 된 것이다.

    당연히 다산(多産)이 다복(多福)이었던 시대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고, '무자식이 상팔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 돼버렸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이유는 만혼에 따른 불임율 증가와 미혼여성이 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임신·출산과 함께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여성인력의 현실적 선택도 한몫 거들었다. 드러내놓기는 어렵지만 근본적 요인은 자녀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고, '자식의 효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많이 드는 것은 교육비다. 자녀 1인당 평균 양육비는 월 82만5000원이고, 이 중 교육비가 30만6000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가 이를 뒷받침한다. 자식이 많을수록 살림살이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늙어서 자식들에게 기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녀로부터 버림받은 노인들이 늘고 있는 것도 고령화사회의 비극이다.

    "코드가 안 맞아 대화가 안돼요"

    실제로 어느 통계를 보니 70대 여성의 경우 6명의 자녀를 위해 약 40년을 소비한 반면, 50대 여성은 4명의 자녀를 위해 36년을, 30∼40대는 2명의 자녀를 위해 28년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의 수는 감소해도 자녀 한 명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에너지는 오히려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식 키우는 투자비용은 늘어나는 데 효용가치는 줄어드니 무자식을 상팔자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식 키우는 부모 마음은 비슷하다. 나이가 어린 자녀는 어린 대로, 자라서는 자란 만큼 걱정도 커지고 늘 조마조마하다. 어린 자녀의 귀가가 늦으면 교통사고나 유괴가 걱정되고, 청소년 자녀의 귀가가 늦으면 탈선이 걱정된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뉴스도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그럴 땐 "공부 못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를 되뇌며 자녀에 대한 기대치를 낮춘다. 자녀가 성년이 되도 불안과 걱정은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맹자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환경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지만, 요즘 어머니들은 학군 좋은 곳을 택해 이사가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자식의 출세를 위해 유학을 보내야 마음이 놓이거나, 하다 못해 어학연수라도 보내야 뒤지지 않을 것 같아 무리를 한다. 기러기 아빠를 남겨 두고 낯선 나라까지 쫓아간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맹모(孟母)보다 교육열이 더 펄펄 끓어 넘친다.

    초중고생 학부모들은 입학해봐야 희망이 보이지 않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측은하다. 대학생 학부모들은 행여나 자식이 졸업 후 직장을 잡지 못할까봐 노심초사다. 청년실업은 갈수록 늘고 대학졸업자 4명 가운데 1명이 '백수'로 빈둥거리는 사회이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부모말씀 고분고분 잘 듣고 희망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다. '가시고기' 같은 아비의 심정을 자식들은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충고라도 하려들면 건성으로 흘러듣는다. 말대꾸나 안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화랍시고 말이라도 걸면 "코드가 안 맞아 대화가 안 된다"는 투다.

    대화 없는 가정의 평화는 '휴화산'

    가족 간에도 코드가 맞지 않아 대화가 단절되기 일쑤다. 한국인들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1시간18분이며 그나마 40분은 식사시간이라고 한다. 함께 있는 시간도 짧지만 그 시간에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만큼 가족 사이가 서먹해졌다. 아버지가 한밤중 일터에서 돌아오면 자식은 낯선 손님 대하듯 인사만 꾸벅하고 제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도 맞벌이하랴 살림하랴 너무 많은 일에 시달려 남편과 자식 챙기는데 소홀해 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쁘다. 학교와 학원을 거쳐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다. 가족 모두가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대화가 없는 가정의 평화는 휴화산과 같다. 잠복해 있던 불만과 갈등이 폭발하면 위기로 치닫게된다. 가족끼리 마주치는 기회가 적거나 대화가 없으면 위기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위기 예방차원에서라도 대화는 필요하다. 흔히 아버지와 아들간의 대화라면 자식의 의지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주문하고 나무라는 것이 다반사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심리적 부담만 주는 강요일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쉽고 서운한 것을 느낀 대로 털어놓고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의사는 소통된다. 마음의 창을 열고 진솔하게 대화해야 신뢰가 쌓인다. 부모는 자식의 버팀목이 되고, 자식은 부모의 희망이 돼야 진정한 가족의 행복이 아닌가.

    대관령 옛길처럼 호젓한 길이 아니라도 좋다. 자녀의 눈높이에 맞는 테마 박물관을 들리거나 근린공원이라도 산책하며 "너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니?"하고 대화의 미끼를 던져 보자.

    - <서울 도시철도공사 사보 9·10월호> (200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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