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865 [칼럼니스트] 2003년 10월 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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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꿈 참신한 눈

    4년전 쯤이었다. 중국음식점 배달원이 가져 온 음식물들을 내놓으면서 맛있게 들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한 뒤 “XX 친구예요. 그래서 몇가지는 좀 많이 가져 왔어요” 하면서 씩 웃었다. XX는 수능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집 둘째녀석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시로 온통 난리인 계절에 고3이 중국집 배달을 하다니... 물론 학교는 수업이 사실상 끝난 상태라고는 하지만 지망대학 결정 및 그에 따른 준비 등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학입시하면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우리 사회에서 기절할 노릇이었다. 진학준비에 몰두해야 할 시기에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도 참 안됐다는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둘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대답이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그 친구는 오토바이 타는 것이 소원인데 쉽게 살 물건이 아니서어 고심하다가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싫도록 탈 수 있다는 점에 착안, 부모의 승락을 얻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자기 실력에 맞는 대학을 들어 갔으니 이른바 문제학생도 아니다.

    어떤 욕망을 그런 방법으로 해소한 그 학생이나 그것을 허락한 그 부모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학생이 학업을 떠나면 꿈을 접은 인생의 패자쯤으로 여기는 세태를 살아온 우리들에게 그들은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신선함과 청량감을 안겨 주었다.

    둘째는 그보다 한 술 더 뜬 친구 얘기를 했다. 재미없는 학교를 중간에 때려 치우고 음식점에 들어가 청소부터 시작하더니 요리를 배우고 장사도 제법 배워 가게의 중간책임자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학에 간 너희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는 돈을 많이 벌어 서로 돕고 살자’고 한다는 것이다. 철없는 것들의 언행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일찍 생활전선에 나선 녀석이나 그 친구들의 티없는 교류를 보면서 세대차이를 느꼈다.

    그러나 그건 매우 흐뭇한 세대차이였다. 예전에는 도중에 학교를 그만 두면 어디 가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평생을 위축되어 살던 이들이 많았다. 그런 고약한 풍토를 그들은 가볍게 일축해 버린 것이다. 학교 성적 높낮이나 가방끈의 길고 짧음은 개개인의 특성이지 우열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행동으로 강조한 것이다. 진정한 희망을 제대로 판독할 줄 아는 그들의 능력과 참신한 시각이 부러웠다.

    만약 당신네 애가 그래도 그런 느낌이겠느냐고 누군가가 물을 수 있다. 대답은 ‘그럴 수 있다’이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부피와 숱하게 겪은 우여곡절이 이를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 ‘청소년상담소식’ 10월호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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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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