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10월 4일 No. 863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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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권이 보호되는 건강한 사회

신문이나 TV를 보면 어떤 사건의 용의자가 검거됐을 때나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출두할 때 얼굴이 잘 안보이도록 사진을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범인이 아닌 이상 개인의 얼굴이 공개된다는 것은 일종의 초상권침해에 해당되기 때문일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경우는 주로 대형사건이 터져 용의자가 붙잡혔을 때 그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나, 구속된 사람이 수갑을 찬 모습으로 나타날 때이다. 그것도 방송사마다 달라서 용의자의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은 곳도 있다.

공인이 잘못했을 경우는 얼굴이 나타나고, 일반인은 모자이크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방송국 자체에서 일정한 기준을 정해 그렇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취지는 인권을 보호하는데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인권보호에 관한 한 참으로 많은 발전을 했다. 과거 1990년대만 해도 웬만한 범인의 얼굴은 시청자들에게 뚜렷하게 보여줬다. 특히 흉악범이나 파렴치범은 카메라기자가 일부러 얼굴을 들게 해서 찍는 것이 상례였다. 미성년자의 경우에만 눈을 가리거나 모자이크처리를 했을 뿐이다.

이런 일은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용의자의 사진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찍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은 촬영에 실수한 경우에 속했다. 그래서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던 대형범죄의 용의자가 붙잡혔을 때는 사진기자들이 경쟁적으로 그의 얼굴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수사기관이나 언론기관은「용의자=범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독자나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신문과 방송들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용의자가 검거됐을 때는 반드시 얼굴사진을 공개했다. 심지어 유력한 용의자를 범인으로 취급해 수배중인 사람의 얼굴사진을 버젓이 신문이나 TV에 공개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범인이나 사망자의 얼굴사진을 싣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지만 필자가 경찰서 출입기자 생활을 하던 70년대는 물론 80년대까지만 해도 강력사건이 터지거나 집단사망사건이 발생하면 용의자나 사망자의 사진을 구하느라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어쩌면 사건내용 보다는 죽은 이의 사진이 더 중요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사건취재를 열심히 하고 기사를 훌륭하게 썼더라도 얼굴사진을 못 구하면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는 본인이나 데스크진이 사진을 구한 신문사에 사정을 해서 썼으며, 중요한 사건일 때는 얼굴사진 없이 보도해야만 했다. 심할 경우 징계까지 받아야 했다.

이런 현상은 이미 50,60년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어서 그저 “당연한 일이거니”라고 여겼지 언론사에서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어쩌면 법조계나 인권단체, 언론학계 등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면서 지금처럼 그나마 얼굴을 가려주는 상황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9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런 일이 점차 사라지는 현상을 나타냈다. 어쩌다가 용의자의 얼굴이 나와도 눈을 가리거나 옆모습 등으로 처리해 일반 독자들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흉악범이나 파렴치범의 얼굴은 안나오고 옷을 덮어쓰거나 모자를 깊숙이 쓴 모습을 볼 때는 답답하기까지 하다. “저런 못된 놈의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왜 보호해 주느냐”는 불평을 사기도 한다.

우리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군사정권의 횡포아래 인권사각지대에서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없이 붙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수사기관도 언론기관도 달라졌고, 시민의 의식도 달라졌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형이 확정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법리를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남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은 마음은 아무리 지나쳐도 잘 못된 일이 아니다. 인권이 충분히 보호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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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http://columnist.org/netporter/
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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