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9월 9일 No. 849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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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한가위

    찬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8일)날 아침에도 이슬 대신 비가 찔끔 내렸다. 8월 내내 기승을 부렸던 '장마 뒤 장마'는 9월 들어서도 지겹게 내린다. 기상청의 공식적인 '장마 종료'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걸러 한 번 꼴로 줄기차게 내리는 '이상한 비'는 각종 진기록를 수립했다.

    지난 6월부터 석 달 넘게 내린 비는 평년치에 비해 350㎜ 더 많이 내렸고, 일조(日照)시간도 평년치 465시간보다 150시간이나 줄어든 315시간에 그쳤다. 서울의 경우, 이 기간 중 1361㎜의 비가 내려 평년 강수량 1001㎜ 보다 36% 더 많았다.

    날씨가 이 모양이니 농작물이 제대로 익어갈 리 만무하다. 일조량 부족으로 사과, 배 등 과일의 당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흉작으로 농민들은 울상이고, 서민들은 차례 상에 올릴 과일이나 채소 값이 너무 올라 한숨이다. 농작물 흉작으로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고추 등 농작물 도둑이 극성을 부리고, 쭉정이뿐인 벼를 갈아엎은 농부도 있었으니 그 속이 오죽하겠는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기에 추석 대목풍경도 쓸쓸하다. 재래시장 상인들은 "IMF 때도 올해 같지는 않았다"고 한숨이다. 백화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100만원대 굴비 세트 등 고가 추석선물이 그나마 잘 팔리는 편이고, 선물세트 매출이 주는 등 서민들은 호주머니를 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소비심리가 위축되어 어느 때보다 '우울한 한가위' 명절이 될 것 같다.

    대한상의가 지난달 말 서울지역 1000가구를 대상으로 소비 행태를 조사한 결과도 3집 중 2집 꼴로 씀씀이를 크게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경기 불안에 소득이 줄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예전 같으면 '추석 보너스'를 받을 생각에 설레었던 직장인들도 추석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연봉제 실시로 사실상 상여금이 없어진데다 회사 차원에서 주는 상품권 등 추석 특별 선물도 뜸해졌다. 임원들이 부하 직원에게 주던 '명절 떡값' 풍경도 사라진지 오래다.

    예전엔 이맘때면 청와대에서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떡값 명목의 활동비를 지급했고, 봉황 문양으로 포장한 멸치나 김을 선물로 나눠주기도 했다. 오죽 썰렁했으면 여당 대표가 청와대를 향해 추석선물은 미풍양속이라는 기대 섞인 발언을 했고, 호남의 복분자 술과 영남의 한과로 '화합형 추석 선물'을 준비했다고 화답했을까. 그것도 서민들에겐 한갓 그림의 떡일 뿐, 계란 한 꾸러미나 비누·치약 선물세트를 전해주며 이웃과 정을 나누던 그 때 그 시절의 추석이 차라리 그립다.

    추석경기만 썰렁한 것이 아니라 정치판도 어수선하고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명절 떡값'이 오가는 대신 '비자금 수사'가 한창이고, 집권 여당은 '야인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난장판이다. 욕설과 막말은 하는 것도 모자라 멱살잡이를 하고,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물세례를 퍼붓는 추태를 만 천하에 공개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은 정치집단 같다.

    그런 모습으로 고향의 유권자를 만나고 한가위 달을 떳떳하게 바라 볼 수 있겠는가. 하긴 올 추석은 날씨가 흐려 한가위 달을 제대로 볼 수 없다니, 달을 보며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긴 추석 풍경도 많이 변하긴 변했다. 한가위의 옛말인 가배(嘉俳)는 여성들이 두 편으로 나눠 길쌈 시합을 하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장만해 대접하면서 가무와 유희로 어울려 놀았던 풍속이 아닌가. 여성들의 잔치였던 추석은, 이제 여성은 엄청난 가사노동에 시달리게 되면서, 추석 스트레스 증후군까지 생겼다.

    추석이라고 새 옷 사 입고 햇곡식에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즐거워했지만, 이제는 추석이라 해서 소비를 특별히 크게 늘리지 않는 생활 패턴도 추석 경기를 평이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변하지 말아야할 것은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산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추석명절 아닌가. 부모는 외면한 채 자식들만 데리고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가족이 있는가하면 휴양지 콘도에서 세트용 제수를 차려 놓고 약식 차례를 지내는 가족도 생겨났으니 추석의 의미가 퇴색하긴 많이 퇴색했다.

    올 추석은 대부분 직장이 닷새동안 쉰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형편에 쉬는 날만 많으니 더욱 썰렁해질 수밖에 없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했으니 가을볕이라도 쨍쨍 내리쬐어 오곡이라도 알차게 여물어 갔으면 좋겠다.

- CEO Report 9월 8일 (2003.09)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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