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9월 8일 No. 848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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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가 만난 영화제 사람들(7)>
여인천하 로카르노영화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차로 2시간 가량 스위스 국경을 넘어 달리면 마조레(Maggiore) 호숫가에 그림처럼 들어앉은 로카르노(Locarno)에 닿는다. 스위스 로카르노는 인구 1만 5천명의 작은 도시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배로 오갈 수 있는 마조레 호수를 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스위스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으면서도 연평균 12.5도(섭씨)를 유지하는 쾌적한 기후 때문에, 이 작은 도시에는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로카르노는 유럽의 평화, 안정을 가져다 준 1925년의 평화협정 체결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도 해마다 8월에 열리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로 더 유명하다. 로카르노영화제는 10위 권 안에 들어가는 A급 영화제다.

    인구 1만 5천의 이 작은 도시에 18만 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다는 사실은 경이적이다. 지난 8월 6일부터 16일까지 이 곳에서 열린 제56회 로카르노 영화제는 유럽을 휩쓴 40도에 가까운 살인적인 더위에도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 든 관객으로 올해도 예외 없이 붐볐다.

    이 숨막힐 정도의 더위 속을 세 명의 여성이 휘집고 다닌다. 이레네 비냐르디 집행위원장, 테레사 카비나 부위원장과 인다스트리 책임자인 나디아 트레스티 - 이 세 여인은 어느 곳에 가든 만난다.

    그 뿐 아니다. 몇 곳에 분산된 사무실마다 책임자들은 거의 모두 여성들이다. 이를테면 로카르노 영화제는 여인천하(女人天下)다.

    그 수장(首長)은 이레네 비냐르디(Irene Bignardi). 이레네 비냐르디는 이탈리아 로마 태생이고 지금도 로마에서 살고 있다. 원래 이탈리아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였고 기자였다. 이탈리아 최대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2001년에 마르코 뮐러(Marco Muller)의 뒤를 이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라 레푸블리카 편집장으로 있을 때인 2000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왔었고 나도 그때부터 알고 지냈다. 이레네는 체구부터가 여장부다. 거구에 선이 굵은 그녀는 카리스마가 있다.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프로그래머로 있던 테레사 카비나를 부위원장으로 앉혔고 첫해부터 ‘로카르노 스타일’을 들고 나왔다. '로카르노 스타일’이란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자유롭고, 오리지널한’ 영화제를 만들자는 것.

    이레네는 2001년 그녀의 첫 영화제에 9명의 경쟁부문 심사위원중 위원장을 포함한 7명을 여성으로 위촉하고 비디오경쟁 부문 심사위원장도 여성으로 위촉함으로써 파란을 일으켰다.

    부위원장인 테레사 카비나(Teresa Cavina)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태어나 베니스에서 대학을 나왔다. 약 10년간 베니스영화제에서 일했고 6년 전에 로카르노영화제로 옮겨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이레네 비냐르디가 집행위원장이 되면서 부위원장이 되었다.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레네 비냐르디를 부산에 초청했더니, 이레네는 부위원장인 테레사 카비나를 부산에 초청해 주기를 희망했고, 그래서 테레사가 처음 부산에 왔다.

    테레사는 글래머 스타일에 성격이 쾌활하다. 나는 독립영화 파티를 계기로 그녀와 친해졌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영화인을 위한 ‘와이드 앵글’ 파티는 젊은 영화인들이 밤새워 맥주 마시고 춤추는 파티로 유명하다. 영화잡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패트릭 기자는 2001년 영화제가 끝난 후 부산영화제의 파티에 관해서 장문의 기사를 썼다.

    ‘부산에 가면 다양한 파티를 즐길 수 있다. 개,폐막 파티는 엄숙하고, 회고전 파티는 매우 우아하다. 그러나 가장 젊고 활기찬 파티는 와이드 앵글 파티다. 밤 2시에 여러 파티를 순회한 김 위원장은 와이드 앵글 파티장에 들어서면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삼바춤(?)을 춘다. 로테르담의 사이먼 위원장, 토니 레인즈, 코슬릭 베를영화제 집행위원장, 허우샤오시엔, 그리고 로카르노의 테레사도 테이블위에서 김위원장과 함께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충 이런 기사였다.

    특히 그날 테레사는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고, 나와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이후 로테르담, 베를린, 칸 등 여러 영화제에서 만났고 그때마다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했다.

    올해 로카르노영화제에는 세 편의 한국영화가 초청되었다.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봄>이 경쟁 부문에서, 박경희 감독의 <미소>, 같은 여성감독인 김진아의 <그 집앞>이 각각 ‘오늘의 영화’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세 편 모두 한국영화를 담당하는 테레사 카비나가 고른 것이다.

    테레사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봄>이 훼비 오디토리움에서 상영된 후 극장을 가득 메운 3천 여명으로부터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받자 옆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의 여린 마음도 갖고 있다.

    나디아 드레스티(Nadia Dresti)는 여러 영화제에서 더러 만난 일은 있지만 1998년 인도 캐랄라영화제에서 며칠 함께 있으면서 가까워졌다. 그녀는 로카르노 태생인데, 4개월은 로카르노에서, 나머지 기간은 파리에서 살고 있다.

    나디아 드레스티는 19년째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는 최고참이며, 산 역사다. 또 3년 전부터는 칸영화제 마켓 책임자인 제롬 파이어와 함께 칸영화제 마켓에서도 일하고 있다. 성격이 쾌활해서 누구나 쉽게 친해 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로카르노영화제는 꽤 오래된 영화제다. 1946년에 창설되었고 칸영화제와 함께 올해 56회를 맞았다. 올해 60회를 맞는 베니스영화제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로카르노영화제는 1989년 배용균 감독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대상인 황금표범상과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과 청년심사위원 2위상을, 그리고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가 청년심사위원 3위상을 동시에 수상함으로써 우리 영화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 10년간 로카르노영화제는 한국영화계와 거의 인연이 없이 지내왔다. 그러다가 1999년에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이 청년심사위원상을 받으면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2001년에는 문승옥 감독의 <나비>로 김호정이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작년에는 우리나라의 문승옥감독과 일본의 스와 노부히로 감독, 중국의 왕 샤오솨이감독이 삼인삼색(三人三色)으로 만든 <전쟁 그 이후>가 비디오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 세편의 한국영화가 로카르노에 간 것이다.

    로카르노영화제를 오늘의 위치로 올려놓은 사람은 이레네 비냐르디의 전임인 마르코 뮐러다. 한국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가 재임하는 10년간 우리영화가 로카르노에 진출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그리고 성격도 까다롭기 때문에 적도 많지만, 의욕적으로 로카르노영화제를 끌고 온 공헌은 자타가 공인한다.

    로카르노영화제의 대표적인 상징은 야외상영에 있다. 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피아짜 그란데(Piazza Grande)에 가로 26미터 세로 14미터의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밤마다 한 번 또는 두 번의 옥외 상영을 한다.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에서 개,폐막식도 열린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매력중의 하나인 수영요트경기장의 야외 상영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다. 1946년 8월 22일에 열린 첫 영화제부터 그랜드호텔 정원에 가로 8미터, 세로 7미터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스위스의 국가를 연주하고 국기를 게양하면서 개막식을 가졌다. 그리고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15편의 공식 초청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그 영화 제작국가의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했다.

    그리고 비가 오면 인근의 리알토(Rialto), 쿠르잘(Kursaal), 렉스(Rex)극장을 이용하여 영화를 상영했다. 1971년, 지금의 피아쩨 그란데 광장을 조성하고 인근의 체육관을 개조한 3천2백 석의 오디토리움 훼비(Auditorium Fevi)와 960석의 라 살라(La Sala), 500석의 랄트라 살라(L'altra Sala)를 조성하면서 주무대를 이곳으로 옮겼다. 아직도 그랜드호텔 정원에는 스크린이 설치되어 시민들에게 영상서비스를 하고 있다. 금년에는 폭염 때문에 야외상영에 지장이 없었지만, 작년에는 비가 많이 내려 우산 받고 영화를 보기도 했고 심지어는 개막식조차 훼비로 옮겨 거행해야 했다.

    로카르노영화제는 상금이 많기로도 상위권에 든다. 금표본상(최우수 작품상)에 9만 스위스프랑, 심사위원특별상과 우수작품상 및 최우수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두 개의 은표범상에 각각 3만 스위스프랑이 수여된다.

    이번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봄>은 비평가, 영화제 집행위원장들,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본상을 받지 못하고 청소년 심사위원 1위상(6천 스위스 프랑), 국제시네마클럽연합회에서 주는 동키호테상(작년에 <오아시스>도 베니스에서 이 상을 받았음), 아시아영화진흥기구에서 주는 넷팩(NETPAC)상, CICAE/ARTE 상을 받는데 그쳤다.

    본상 시상식 및 폐막식에 앞서 마련된 시상식에서 김기덕 감독은 여러차례 불려 나가면서 뜨거운 박수를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 심사위원장은 시상식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당연히 상이 갔어야 했지만 신인을 격려하기 위해 다른 영화에 상을 주게 되었다는 부연 설명을 하기도 했다. 본상 시상식에서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파키스탄(프랑스, 독일 공동제작) 영화 에 대해 야유가 쏟아졌던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 '프리미어'9월호(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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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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