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9월 5일 No. 845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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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가 만난 영화제 사람들(6)>
영화계의 정치 9단-모리츠 데 하델른

모리츠 데 하델른(Moritz de Hadeln)은 세계영화계에서 '정치9단'으로 불린다.배타성이 특별히 강한 독일사회에서 모리츠 데 하델른은 1979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22년간을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었다.

그는 영국태생의 스위스 사람이기도 했지만 독일문화의 상징인 베를린영화제의 개, 폐막식장에서 시종일관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해서 독일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면서도 22년을 버텨왔었으니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리츠 데 하델른은 1940년 영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파리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두 편의 다큐멘터리영화를 제작했다. 그 이후 영화 편집보조, 촬영감독 그리고 조감독생활 하다가 1968년에 스위스로 돌아와서 니용(Nyon) 다큐멘터리영화제를 창설했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6년간은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79년 1월 모리츠 데 하델른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제3대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칸, 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베를린영화제는 1951년에 창설되었다. 초대 집행위원장인 알프레트 바워는 1976년까지 26년간을 재임했고 그 후임으로 취임한 볼프 도너는 3년만에 사임했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모리츠 데 하델른은 재임 22년동안 베를린영화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그의 정치적인 수완을 최대로 발휘해서 영화를 통한 동서 두 진영의 화합과 협력체제를 확대 구축하면서 특히 영화제의 본부를 새로 조성되는 베를린 신시가지, 포츠다머 광장으로 이전했다.

2000년 2월 베를린영화제 50주년 행사를 이곳에서 화려하게 개최한 직후 시 이사회와 연방정부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계약기간을 2년 앞당겨 해임통보를 받고 그는 2001년의 51회 영화제를 마치고 물러났다.

퇴임하자마자 모리츠 데 하델른은 영화사를 차렸지만 그의 정치생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02년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는 격변에 휩싸인다. 베를루스코니 우파정권이 집권하면서 베니스 비엔날레 회장, 국영방송사 사장등을 교체했다.

이 와중에서 임기 1년을 앞두고 있었던 알베르토 바베라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도 사임했다.당시 이 사건은 세계영화계에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세계영화계의 적지 않은 반대운동 속에서 이탈리아정부는 후임자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3,4개월의 진통 끝에 모리츠 데 하델른이 1년 계약의 새 베니스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낙점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영화제를 무난히 마치고 이제 8월 27일 개막되는 제60회 베니스영화제를 주관한다. 아마도 계약기간이 연장된 때문이겠지만.

모리츠 데 하델른에게는 행운도 따르는 것 같다.그는 50주년의 베를린영화제와 60주년의 베니스영화제를 주관했던 영화인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에...

모리츠 데 하델른과 부산영화제와는 악연으로 출발해서 지금은 가까운 사이게 되었다.1996년 9월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났을 때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오랫동안 그와 함께 베를린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두 축의 하나인 울리히 그레고르와의 최악의 관계 때문이었다.울리히 그레고르는 1963년부터 영화평론가로 베를린영화제의 영화평론을 맡아왔고 1970년에는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부인 에리카 그레고르와 함께 베를린영화제안에 본선 경쟁부문과는 별도로 '젊은 영화의 국제 포럼' (International Forum of Young Cinema)을 창설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2001년 데 하델른과 함께 물러날 때까지 31년간을 이 분야의 책임자로 일해 왔다.모리츠 데 하델른이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될 당시 오랫동안 베를린영화제와 함께 일해 온 울리히 그레고르는 당연히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 후 3년 또는 5년의 계약기간이 만료될 때마다 모리츠 데 하델른의 후임으로 울리히 그레고르가 부상되었고 또 영화제의 내용 면에서도 본선인 경쟁부문보다 포럼부문의 프로그램이 더 좋다는 평가를 받아왔고 한때 울리히 그레고르는 '영 포럼'을 베를린영화제에서 독립하여 다른 날짜에 개최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모리츠 데 하델른과 울리히 그레고르는 베를린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쌍두마차였음에도 오랜 숙적관계에 있었다. 모리츠 데 하델른은 할리우드와 일본, 중국을 보다 선호한 반면 울리히 그레고르는 한국을 선호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몇 차례 한국에 왔고 나도 한 두 번 만났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준비하던 1996년 4월 나는 홍콩영화제에 참가해서 울리히 그레고르에게 심사위원으로 부산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다른 일정 때문에 에리카 그레고르를 참석시키겠다고 약속했고 우리는 에리카 그레고르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이것이 모리츠 데 하델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해 11월인가, 영화진흥공사 초청으로 영화선정을 위해 서울에 온 모리츠 데 하델른은 공사측이 제시한 부산영화제 카탈로그를 본 순간 에리카 그레고르가 어떻게 심사위원이 될 수 있느냐고 폭언하면서 영화 보기를 거부하고 돌아가 버렸다. 베를린영화제에서 몇 년째 한국영화가 본선 경쟁부문에 선정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나는 모리츠 데 하델른과의 관계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1998년 2월 베를린영화제를 처음 방문해서 그를 만났다.

마침 바로 직전인 1월 28일 네델란드에서 로테르담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와의 자매결연행사를 치르고나서 프랑스 파리의 칸영화제 사무실에 들려 질 자콥 집행위원장과 업무협의를 마친 직후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모리츠 데 하델른은 나에게 네 가지만 묻겠다고 했다.

첫째, 제1회 영화제에 왜 에리카 그레고르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느냐.
둘째,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행사를 가졌다는데 어떤 행사인가.
셋째, 칸영화제와 부산영화제는 무슨 커넥션이 있는가.
넷째, IMF상황에서 부산영화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의 질문은 직선적이었고 부산영화제와 그레고르 부부가 우호적인데 대한 강한 불만과 칸영화제와의 경쟁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후 칸과 베니스 등에서 그를 몇 번 만났다. 다음해인 1999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모리츠 데 하델른을 만나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당신에게 '한국영화공로상'을 주었으나 불참했기에 이곳에서 상패를 전달하겠으니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다음날 그의 사무실에 갔을 때 그는 그의 부인 에리카(그레고르 부인과 같은 이름)와 카메라맨을 대기시켜 놓고 상패인 전통 부채를 받았다. 다음날 이 사실이 영화제 데일리 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한국영화공로상'은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에 공헌한 사람들을 선정해서 시상하는 것으로 제1회 영화제에서 울리히 그레고르가 수상한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기사를 읽은 에리카 그레고르가 대로했다.이미 첫 영화제에서 이 상을 남편에게 시상한 바 있지만 워낙 격분해 있기 때문에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귀국해서 해명성 편지도 보내고 했지만 에리카 그레고르의 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베를린영화제는 물론 다른 해외 영화제에서 자주 만나도 한결같이 외면이다.

그해 가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레고르 부부와 셋이 조찬을 하면서 다시 해명 겸 사과를 했다. 그들은 이제 없었던 일로 하고 종전처럼 지내자고 하면서 화해했다.

그러면서도 직후에 열린 부산영화제에 불참했고(베니스에서 영화제가 신 시가지로 옮기는 문제로 일이 많아 못 올 것 같다는 언질을 주긴 했지만...), 그 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만나도 여전히 앙금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앙금은 작년 8월 1일부터 11일까지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가 수여하는 넷팩상 심사위원으로 함께 참석하면서 완전히 풀 수 있었다. 실로 3년 반의 정성을 쏟아 복원한 인간관계다.

그 대신 모리츠 데 하델른 부부하고는 친해질 수 있었다.나는 부부를 여러 차례 해외 영화제에서 만났다. 베를린영화제를 떠난 후에는 부산을 방문하고 싶어했다.

모리츠 데 하델른이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발탁된 직후 나는 축하전문과 함께 한국영화에 대해 관심을 쏟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5월 칸영화제에서 만났다. 축하인사를 하고 부산영화제 방문을 요청했다.

그는 1년 계약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베니스영화제가 끝난 후 '살아남는 다면...부산은 가겠다' 고 답했다. 그가 처음 맡은 베니스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감독상과 신인연기상(문소리)을 수상했다.

시상식 전날 저녁 그는 나를 보자고 했고 수상내용을 미리 알려주었다.집행위원장으로서 수상내용을 그 전날에 미리 알려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다녀갔고 이제 부산영화제를 좋아하는 세계영화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두 번째 맞는 제60회 베니스영화제에는 운 좋게도 칸영화제에서 초청했으나 시간을 맞추지 못해 베니스로 온 거장들의 영화가 많다. 그는 문소리가 주연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을 경쟁부문에 선정했다.베니스영화제의 결과가 주목된다.

그리고 정치9단 모리츠 데 하델른이 그 정치바람 센 베니스영화제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지 전 세계 영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프리미어'8월호(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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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http://columnist.org/ge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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