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8월 25일 No. 83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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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세상 엿보기(23)
화폐 속의 인물

본관(本貫)의 사회적 기능과 신분관념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된 요즘도 "어디 이씨"냐는 질문을 가끔씩 받는다. 허물없는 자리라면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나, 진보 이가"라고 밝힌다. 1000원 지폐 앞면엔 향로와 함께 유건(儒巾)을 쓴 인물 어깨 부분에 깨알보다 작은 글씨로 '퇴계 이황'이라 적혀 있다. 퇴계의 본관이 진보(珍寶)니까 퇴계 후손임을 은근히 과시하는 격이다. 5000짜리 지폐엔 본관이 덕수(德水)인 율곡 이이의 인물초상이 담겨 있다.

지폐에 그려진 인물에 대한 일화가 있다. "진보 이씨가 덕수 이씨 보다 많은 데, 왜 화폐가치가 낮은 1000원짜리에 퇴계 선생의 인물을 넣었느냐"고 이황 후손들이 조폐공사에 항의성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조폐공사의 대답이 걸작(傑作)이다. "1000원짜리의 사용빈도가 5000원 지폐 보다 많으니 조상을 알리기에 더 좋은 것이 아니냐"고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자료에 따르면 진보 이씨는 14,428가구(58,877명)로 덕수 이씨 10,580가구(43,505명)보다 3,840가구(15,372명)가 많았다.

화폐 도안을 둘러싼 물의도 있었다. 1972년 10,000원짜리 지폐를 발행할 때 도안소재를 석굴암의 본존석가여래좌상과 불국사 전경으로 결정한 뒤 공고까지 마쳤다. 그러나 특정종교와 연관이 있다는 또 다른 종교계의 반발에 따라 세종대왕과 경회루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발행이 한 해 늦어졌다.

화폐는 그 나라의 수준과 문화를 나타내는 얼굴이다. 따라서 각 국의 화폐도안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 동식물, 문화유산 등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지폐 속에는 세종대왕(10,000원)과 이이(5000원), 이황(1000원)의 인물초상이 담겨있고, 동전에는 학(500원), 이순신(100원), 벼(50원), 다보탑(10원), 무궁화(1원)가 새겨져 있다.

돈을 둘러싼 사건과 사고가 빈발하듯, 돈 속의 인물을 둘러싸고도 말들이 많다. 왜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남성이며, 이씨 성에 조선시대 인물뿐이냐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60년대까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초상이 들어간 지폐가 있었다. 그 또한 남성이며 이씨다.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에서도 지폐에 김구, 유관순 등을 포함시키는 방안이 추진됐다. 최근엔 화폐 속에 여성 인물을 추가하자는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들이 추천하는 '여성 후보'는 선덕여왕, 신사임당, 유관순, 명성황후, 김만덕, 허난설헌 등 6명이다. 낯선 이름 김만덕은 조선 정조 때 기생 출신 여성실업가로 제주 주민이 태풍으로 굶어죽어 갈 때 전 재산을 내놓은 인물이다. 여기에 10만원권 지폐 발행에 대한 논란과 함께 디자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온다. 새로운 지폐가 발행되려면 등장인물과 시대, 성(性)의 불균형 조정과 디자인까지 신경 써야하니 의견수렴의 진통을 겪어야 탄생될 것 같다.

- 담배인삼신문 2003.08.22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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