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8월 20일 No. 835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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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걸프 전쟁’/ 8월 20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프레시안 2003-08-20


  1988년 오늘 ‘걸프전쟁’이 끝난다. 놀랄 것은 없다. ‘걸프전쟁’이라면 그 3년 뒤인 91년 이라크와 미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나 1980년부터 8년 간 이란과 이라크가 벌인 전쟁도 걸프전쟁이나 페르샤만 전쟁으로 불리었다.
  
  다만 ‘걸프 전쟁’이라는 이름을 다른 데 뺏겨도 큰 혼란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처럼 유명한 전쟁은 아닌 셈이다. 전쟁이 유명해서 좋을 건 없으나 8년 간이나 끌어온 전쟁이 불과 두어 달 사이에 끝난 그 뒤의 걸프 전쟁보다도 이름이 없으니 그 희생자들이 새삼 안된 느낌이다. 그렇게 오래 싸웠으나 뚜렷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유엔의 휴전권고를 받아 들여 싱겁게 종결된 것도 그랬다.
  
  하지만 그것도 분명 ‘걸프전쟁’이었다. 훗날의 걸프전쟁이 영국의 식민지배가 남기고 간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지도 때문에 일어났듯이 그 전쟁도 영국이 남기고 떠난 이란-이라크 국경 때문인 것부터 그렇다..
  
  37년 국경을 책정할 때 영국은 양국 사이의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중앙선을 경계로 해야하는 관례를 깨고 영국의 입김이 더 먹히는 이라크가 그 수로를 차지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사할린이나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포클랜드처럼 계속 분쟁의 불씨가 돼 왔다.
  
  1980년 무렵은 그 불씨에 불이 붙기 좋은 상황이었다. 그 전해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내쫓은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은 미국 대사관원들을 인질로 억류하는 등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전해 집권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아랍의 맹주를 꿈꾸는 야심가였다.
  
  그 틈을 비집고 미국이 끼어 든 것도 걸프전 같다. 아니 이때부터 미국은 걸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뚜렷이 나타난 것이 없다. 다만 이란이 소련 무기로 무장했다면 이라크는 미국 무기로 무장했다. 전쟁 막바지인 7월 3일에는 호르무스 해협에서 미 군함이 지대공 미사일로 이란의 에어버스를 떨어뜨려 승객 290명이 몰사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은 그 에어버스를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했으나 미국인들도 믿지 않을 소리였다.
  
  아무튼 당시만 해도 미국은 후세인을 지지하거나 용인한 셈이다. 실은 후세인의 존재 자체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3년 뒤 갑자기 후세인은 희대의 폭군으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는다.
  
  바뀌지 않는 것은 이란과 이라크의 오랜 갈등이다. 호메이니가 가고 소련이 사라져도 그 갈등은 남아 이번의 이라크 전쟁에서도 이란은 이라크내의 반정부 세력을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미국이 그것에 고마워하는 기미가 없는 점이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이란은 ‘다음 표적’의 하나로 떠오르는 악의 축 국가의 하나가 됐다. 미국은 아직도 호메이니 시절에 벌어진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차라리 그런 정도라면 해법이 있을 수 있으나 미국이 이라크처럼 이란의 ‘검은 물’에도 눈독을 들이는 것이라면 앞이 어둡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 보면 이란과 이라크는 불우한 이슬람 형제였다.

양 평/언론인    http://columnist.org/yang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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