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7월 29일 No. 821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 |

거짓말 그리고 거친 말

말은 습관이다. 무심결에 "솔직히 말해서…"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흔하다. 대화 상대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는 친밀감과 솔직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겠지만, 그 이전까지 솔직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둔갑될 소지가 많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거짓말에 익숙해지고, 거짓말 실력도 는다. 사회 전반에 스며든 거짓말 풍토는 '상황'과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 탓도 있다. 상황이 달라지면 말과 행동도 그것에 맞춰 바꾸려는 경향이 강하다. 좋은 뜻으로 보면 융통성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거짓말이다.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진다. 서로가 기분 안 나쁠 정도의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악이다. 노처녀 "시집 안가겠다"는 말은 애교 섞인 거짓말이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에게" 얼굴 좋아지셨네요. 건강하시죠"라는 인사는 친밀한 거짓말이다.

한 번 토해낸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거짓말은 '늑대소년'처럼 언젠가 들통나게 마련이다. 대화하면서 눈을 자주 깜박이기거나, 시선을 피하거나, 머리를 긁적이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행동의 반증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 안의 조직이 충혈 되고 가려워져 자꾸 손으로 문지르게 된다고 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은 성추문 증언을 할 때 코를 1분에 26차례나 만졌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거짓말 잘하기로는 단연 정치인이다.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제럴드 젤리슨 박사의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클린턴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행각을 숨긴 것이나 워터게이트로 대통령직을 도중하차했던 닉슨의 거짓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1등 거짓말쟁이는 단연 린든 존슨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고조 할아버지가 알라모 요새에서 사망했다고까지 '사기'를 친 인물이다.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거짓말을 한다는 농담까지 나왔으니 오죽했겠는가.

정치인의 거짓말이나 말 바꾸기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정치인이다."고 흐루시초프는 일찌감치 일침을 놓았다. 거짓말 잘하는 직업에는 변호사, 세일즈맨, 정신과 의사는 물론 언론인도 포함돼 있다.

거짓말 잘하는 직업엔 언론인도

정치인의 거짓말 가운 데 백미는 지난 4월 전두환 전대통령의 법정 진술이다. "29만1000원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라는 주장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것을 빗댄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라는 제목의 컬러링(휴대전화 통화연결음)이 덩달아 화재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안돼. 울 할아버지가 그러는 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요리사·경호원·운전사 밖에 못 둔대.(중략) 에이, 진짜 짜증나. 대머리 할아버지, 우린 왜 이렇게 가난한 거예요. 가난이 너무 싫어요.' 절로 웃음이 난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나고 말을 잘못 하면 설화(舌禍)를 입게 된다. 정치는 말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철새정치인의 말 바꾸기와 정치인의 거친 말은 정치혐오 현상을 부추겼다. 특히 선거 철이면 차마 입으로 옮기기조차 부끄러운 언어폭력이 난무한다.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내용은 물론 확인되지 않은 남의 사생활을 여과 없이 토해낸다.

몇 년 전 정치판에서 "재봉틀로 입을 꿰매야겠다" "입을 시멘트로 발라야 할 사람" 등의 막말까지 나왔다. 최근엔 '잡초론'에 이어 "선혈이 낭자하게 싸워야"한다는 살벌한 말이 나오더니 대통령의 방일외교를 '등신외교'라고 몰아붙였다. 거친 말싸움으로 상생(相生)의 정치는 뒷전이고 상극(相剋)의 정치가 판을 친다.

정치인들의 말이 험악해진 것은 인기에 영합하려는 빗나간 과시욕이 대부분지만, 정당 '대변인제도'에도 문제가 있다. 대변인들은 '허가 낸 욕쟁이'다. 삼빡한 말로 상대를 약올리고 골탕먹일 수 없을까 궁리하고, 대변인의 비난과 성토가 점잖아 성에 차지 않으면 부대변인들이 나서서 욕질의 밀도와 함량을 높인다.

요즘 노무현대통령의 말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반어와 역설법을 자주 쓰고 "개판"이니 "쪽수"니 하는 비속어도 거침없이 나왔다. 비속어는 언어의 표현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고,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 감칠맛이 난다지만 대통령의 말로는 부적절하다. 신문들은 연일 대통령의 말을 후벼파고, 청와대측은 탈(脫)권위로 이해해 달라고 한다.

정치권의 막말풍조 사회전반에 확산

낡고 권위적인 격식의 파괴도 좋고, 서민의 체취가 물신 풍겨나는 말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정을 총 책임지는 대통령의 표현으로는 격에 맞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이 유행어가 되어 어린이까지 흉내내면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다. 대통령의 "맞습니다, 맞고요"는 이미 유행어가 됐고,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죠"도 유행을 탔다. "못해 먹겠다"는 말은 국내외 언론의 기사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권의 막말 풍조는 사회전반으로 확산돼 각계 이익집단의 거친 말과 구호가 거리에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정치인 같은 공인은 말 한마디에도 신중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심하면 제 발등을 찍게된다.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하고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남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의 무게와 같은 가치를 지녀야 할 진데, 하물며 사회지도층에 있거나 공인의 위치에 있는 인사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거짓말은 할수록 늘고 거친 말을 쓰면 행동도 거칠어진다.

- 월간 '사진기자' 7월호(2003.07)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