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7월 19일 No. 81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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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세상 엿보기(19)
명창 박동진

박동진(朴東鎭) 명창을 처음 만난 것은 10여년전 서울 탑골공원 부근에 있던 '박동진판소리전수소'였다. 장충동에 있는 국립국악원(원로사범실)에 새벽같이 출근해 후진들을 지도하고, 다시 전수소로 나와 비좁은 계단을 3층까지 오르내리며 제자들의 소릿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면 신명나는 즉흥 사설과 걸쭉한 육담(肉談)으로 청중들을 웃기고 울렸지만, 제자들을 지도할 때는 무척 엄격했다.

1994년 국악의 해에는 고향집 뒷산 암자 터에 움막을 짓고 똥물을 마시며 소리공부를 했다는 독공(獨工)터를 찾았다. 독공을 하던 당시는 대덕군 진잠면이었으나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산허리가 잘려나간 야산 중턱으로 한밭을 감싸고 있는 구봉산이 마주 보이는 곳이다. "쉰 목청으로 소리만 질러댔더니 이가 흔들리고 입술은 부르터 당나발 같았고 얼굴과 몸은 물에 빠진 시체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고 회고했다. 독공을 끝낸 그는 권번에서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하거나 여성국극단을 따라다니는 등 고생이 많았다.

박동진 명창은 판소리의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1970∼80년대를 풍미했다. 1968년 최초로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完唱)한 데 이어 이듬해 '춘향가'(8시간), 70년 '심청가'(6시간) '변강쇠타령'(5시간), 71년 '적벽가'(7시간), 72년 '수궁가'(5시간)를 차례로 완창, 토막소리가 판치던 시절에 판소리 완창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1992년 CF 광고에 출연하여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판소리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 또한 크다.

전통소리에만 그치지 않고 '예수전' '이순신전' '팔려간 요셉' 등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 불렀다. 한번 읽거나 들으면 쉽게 잊지 않는 기억력과 타고난 소리감각 덕분이다. 판소리 여섯 마당 가운데 질펀하고 화끈한 내용이 많아 지금은 불리지 않는 '변강쇠 타령'을 완창할 줄 아는 명창도 그 뿐이었다. 끈기와 집념, 오기로 독창적인 소리세계를 일군 대기만성형이다.

그는 칡뿌리와 찔레순으로 허기를 채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고향을 일곱 살 때 떠나, 각고탁마 끝에 판소리인간문화재가 되어 75년 만에 '화려한 귀향'을 했다. 고향인 공주시 무릉동에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을 지어 후진들을 지도하며 말년을 보냈다. 기공식 때에 이어 3년전 그곳에 다시 들렀다. "전수관 건물이 절 집처럼 높아 생활하기에 불편하겠다"고 했더니 "육실헐 놈들이 이렇게 덩그렇게 지어놓았다"던 모습이 마지막이 됐다.

한 시대를 총총하게 빛낸 국악계의 별 박동진 명창은 지난 8일 87세를 일기로 소리무대를 저승으로 옮겼다. 명창은 갔지만 그의 소리는 남아 우리를 웃기고 울릴 것이다.

- 담배인삼신문 2003.07.18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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