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7월 14일 No. 808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 |

‘에스페란토 21’/ 7월 14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프레시안 2003-07-14


  1887년 오늘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만든 L L 자멘호프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폴란드계의 유태인 안과의사다. 안과의사가 그런 일을 했다고 감탄할 것도 욕할 것도 없다. 한국의 안과의사 공병우(公炳禹)도 한글기계화에 헌신해 공병우 타자기로 더 알려져 있다.
  
  자멘호프의 직업보다는 유태인이라는 혈통이 더 눈길을 끈다. 그가 유태인들의 민족사이기도 한 구약성서에서 바벨탑 이야기를 열심히 읽고 에스페란토를 만든 것만 같아서다.
  
  성서에서는 사람들의 말이 다르면 탑을 올리지 못한 것으로 끝나지만 역사에서는 그것이 대부분의 비극의 직접 간접 원인이 돼왔다. 그래서 인류의 언어를 통일하려는 시도는 기원전부터 있었고 민족전쟁이 한창이던 17세기에는 그 열망이 더했으나 결실은 없었다.
  
  우연히도 자멘호프가 태어난 러시아령 폴란드의 비아위스토크는 바벨탑의 현장 같은 곳이었다. 이 방직도시에서는 폴란드어 러시아어 유태어에다 독일어까지 4개의 언어가 사용되면서 불편과 불신 그리고 이에 따른 불화는 다른 곳의 4배쯤은 됐다.
  
  그래서 고교생이던 자멘호프는 보편어를 만들었고 그 뒤 이를 다듬어 9년 뒤에 ‘국제어(Lingvo Internacia)라는 교본을 러시아어로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본명대신에 ’에스페란토‘(희망하는 사람)라는 필명을 썼는데 그것이 이 국제어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인도 유럽어족을 뿌리로 해서 로마자에 바탕을 둔 에스페란토는 동양의 언어와는 무관하여 완벽한 국제어와는 거리가 멀다. 천재성이 비치는 것도 아니며 너무 쉬워서 얼핏 유치할 정도다. ‘에스페란토’(ESPERANTO)가 그렇듯 발음부호가 따로 필요 없이 기초적인 구미어를 아는 이는 적어도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알파벳에서 다른 글자로도 표기할 수 있는 Q W X Y를 없애고 C G H J S U의 변용어를 추가해서 글자는 2자 늘어났으나 영어 등에서 보는 엉뚱한 변음이나 묵음 등이 없어 혼란은 없는 편이다.
  
  모든 언어에서 볼 수 있는 엉뚱한 발음은 그 나라의 역사에서 자라난 개성의 산물이지만 타국에서 보면 그 나라만의 아집이나 편견처럼 비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것을 없앤 에스페란토는 얼핏 기계적이지만 어느 언어에도 우위를 주지 않은 이상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에스페란토는 갈수록 지구촌의 언어로 자리잡아야 마땅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를 맞아 영어가 갈수록 국제어가 돼 가고 있고 그것은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라”던 팍스 로마나 시대와도 다르다. 인터넷 시대와 함께 맞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는 “미국에 가지 않아도 미국인이 되라”가 금언이다. 초등학생까지 영어학원을 찾는 것도 그런 금언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국어에 자부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프랑스인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인터넷이 사실상 영어에 점거된 상태에서 프랑스어만 고집해 봤자 국제경쟁력만 뒤져 요즘은 급속히 영어가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1870년의 보불전쟁에 졌을 때보다도 참담하다. 당시는 엄숙하게‘마지막 수업’을 한 아멜 선생 같은 이라도 있었으나 요즘의 프랑스 기업체에서 그처럼 프랑스어를 사랑하는 이들이 점차 왕따 당하고 있는 것이다.

양 평/언론인    http://columnist.org/yangpy


프레시안에서 양평 글 보기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를 평가해 주십시오.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