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7월10일 No. 80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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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화

고국을 10여년 만에 찾은 미국 뉴욕의 교민이 겪은 일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휴대전화를 세놓은 곳에 가서 한 대 빌리라는 이웃 교민들의 말을 흘려 들은 그녀는 그냥 서울로 들어왔다.

웬만한 곳은 다 공중전화가 있는데 굳이 비싼 돈을 내고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가지고 다니다 잊어버릴 경우도 고려했다.

그러나 서울에 발을 딛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곧 깨달았다. 간 곳마다 있으리라 예상했던 공중전화는 결코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한참 먼 곳이나 외진 곳에 있어 한번 사용하려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10여년 전의 한국이 아니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섰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고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있었다. 어쩌다 서 있는 공중전화는 퇴락한 술집의 늙은 주모처럼 거들떠 보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고국 체류 동안 전화 때문에 애를 먹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옆 사람들 말을 안 들었다가 '서울에서 뉴욕촌년 노릇하다가 왔다'며 깔깔댔다. 한국이 정보통신 강국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그렇게 실감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시민들과 1백년 가까이 애환을 같이 하던 공중전화가 이처럼 급속히 퇴장하고 있다. 남아 있는 것은 수입보다 관리비가 더 들어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실정이다.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공중전화가 선 보인 것은 1902년 3월 20일이었다. 통신업무를 관장하던 통신원이 한성과 인천사이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면서, 조정에서 전화를 사용한지 6년만에 민간인이 전화를 쓸 수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지난 1954년 흑색 탁상용 공중전화가 등장했는데 역시 관리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했다.

엄밀한 의미의 공중전화 시작은 1962년 7월1일이리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장에 옥외 무인공중전화 10대가 설치되고 이어 서울시내 번화가에 선을 보이면서 공중전화는 본격적으로 가설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전화요금은 1통화당 5원이었다. 1969년에는 최초의 국산 공중전화인 체신1호 공중전화기가 선보였는데, 이 전화기는 1977년 요금이 10원으로 인상되기 전까지 전화가 없는 일반시민의 유용한 통신수단으로 사랑을 받았다.

70년대 초반까지 집에 전화가 있는 것은 부유층 징표였고, 공중전화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세련된 도시민의 상징이었다. 시골에서 어쩌다가 서울 나들이를 한번 하면 공중전화를 써 보고 온 것이 큰 자랑이었다. 어떤 사람은 촌티를 내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이 공중전화 거는 것을 옆에서 몰래 유심히 살펴보고 했더니 성공적으로 잘 되더라며 자기가 도시 사람과 다름이 없이 했음을 과시하고, 자기 눈설미가 좋은 것도 은근히 자랑했다.

지방에서는 공중전화가 동네 부근에 생기면 주민들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건 도시화와 문명의 지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전화 유치에 힘깨나 썼다고 자부하는 지역 유지나 정치인들은 그걸로 목에 힘을 주기도 했다.

앞 사람이 통화를 길게 한다고 툭하면 시비가 일었고, 심하면 살인사건까지 불러왔던 공중전화가 이제는 맡은 배역을 다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 99년에 최고 56만대에 이르던 것이 2000년부터 크게 감소하기 시작, 지금은 20만대 수준이다.

반면 휴대전화 소지자는 3천2백만명으로 어린이들과 일부 노인들은 제외한 전 국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사용자 숫자는 세계 상위권으로 우리는 통신혁명기를 살고 있다.

'극성(極盛)이면 필쇠(必衰)'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전성기를 맞으면 그 다음은 쇠하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열흘 붉은 꽃 없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1백년간 번성해 온 공중전화도 이렇게 시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공중전화에 그치겠는가.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가끔 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는 걸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 담배인삼신문 7월4일(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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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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