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7월 8일 No. 799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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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세상 엿보기(17)
빨간 우체통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靑馬) 유치환이 안타까운 사랑을 담아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배달한 시 ‘행복’은 경남 통영우체국 앞에 시비(詩碑)로 남아 읽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청마는 정운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편지를 하루가 멀다하고 빨간 우체통에 넣었고, 아름답고 순수한 두 사람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도 배달됐다.

빨간 우체통은 기쁘고 슬프고 비밀스러운 우리의 마음을 간직했다가 전해주는 ‘소통의 가교’다. 중년을 넘긴 사람들은 밤새워 쓴 편지를 들고 우체통 앞에 서성이던 추억을 한가지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연필로 꾹꾹 눌러 ‘국군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썼고, 깊은 밤 라디오 음악프로를 들으며 ‘미지의 여인’에게 펜팔 편지를 쓰던 낭만이 있을 것이다. ‘보고싶은 그대에게’ 그리움과 애틋한 연정을 담아보내고, ’아버님 전상서‘를 통해 향토장학금을 보내달라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육필로 쓴 편지를 하얀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불룩한 가방을 둘러메고 동네에 들어서는 우편배달부는 늘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를 받아 보던 그 때 그 시절의 편지가 그립다.

요즘은 사랑고백도 e-메일과 휴대폰으로 전하는 세상이 됐다. 특히 젊은이들은 번거로운 편지 대신 예쁜 그림과 음악, 동영상까지 보낼 수 있는 e-메일을 사용하고 있으니 동네 어귀마다 서있던 빨간 우체통은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전국 길거리에 설치된 우체통은 2000년 말 3만9400여개에서 2001년 말 3만8600여개로 줄었다고 한다. 전국 우체통 800여개를 철거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편지를 부치려고 해도 우체통을 찾지 못해 우체국까지 찾아가는 불편을 겪는 시민들도 있다. 편지를 넣어야할 우체통에서 쓰레기가 적지 않게 나오고, 심지어는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넣어 소중한 우편물이 훼손되기도 한다니 몰지각한 행위에 분노가 치솟는다.

우표 발행량도 지난 1998년 9억7000만 장에서 지난해는 5억8000만 장으로 40%나 줄자, 정보통신부는 각종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고 고객 끌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새로 발매하는 ‘맞춤형 엽서’는 결혼식 안내부터 돌잔치, 동문회는 물론 기업의 광고까지 인쇄해 배달까지 해 준다. 풀이나 침을 바르지 않아도 되는 스티커 우표도 내 놓았지만 e-메일에 익숙해진 고객들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체통은 언젠가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 ‘빨간 우체통’에 넣던 순수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담배인삼신문 2003.07.04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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