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6월21일 No. 780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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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꿈

노량진에서 왕십리 중앙시장까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느라 사타구니에 피멍이 그칠 날 없어 피묻은 팬티를 남몰래 빨며 젊은 날을 보내야 했던 한 친구는 그 덕분에 중소기업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잔인한 가난 때문에 앞뒤 가릴 틈 없이 젊음을 소비한 후유증을 적지 않게 앓고 있다.

특히 순환기 계통이 좋지 않아 툭하면 두통 등 여러 가지 통증을 호소한다. 의사 처방전에 따라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지만 시원치 않아 고생이 많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깝다.

그런 그가 하루쯤 연락이 안 되거나, 심하면 3, 4일간씩 소재 파악이 안 될 경우가 가끔 있다. 언젠가 물었더니 그때마다 안면도를 갔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남해안 어느 섬이다. 그래서 고향 바다가 그립지만 너무 멀어 대신 거길 갔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까운 인천, 강화도도 있는데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안면도를 가야 송진냄새를 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곳의 솔숲을 찾아간다는 말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숲이란 낱말은 흔히 쓰이는 것 같지만 구어라기보다는 문어에 가깝다. 글 속에서는 자연스럽지만 대화 속에 나오면 좀 어색한 단어다. 예술 한답시고 온갖 호들갑을 떨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문학청년 티를 벗지 못한 사춘기 청소년끼리 입에 올리면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한테는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솔숲이란 말보다는 솔밭이 더 어울린다.

친구는 그래서 송진냄새를 맡으러 간다고 한 것이다. 솔숲이건 송진이건 문제는 거기 가면 그토록 자기를 괴롭히던 두통, 현기증, 스트레스 등 각종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부싸움 뒤에도 그곳으로 달려가 상당 시간을 보내고 온다.

그에게 숲은 고향이요 때에 따라서는 가정보다도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다. 그런 도피를 이제 좀 먹고 살 만하니 유난스럽게 티를 낸다거나 치졸한 감상적 처사라고 못 마땅해 하는 친구가 더러 있지만 나는 많은 부분을 이해한다.

그 친구와 고향은 다르지만 나도 바다가 마주 보이는 솔숲에서 어린 날을 많이 보냈다. 마을 부근에 대숲도 있고 잡목숲도 있었지만 솔숲만큼 우리를 품지는 못했다. 특히 겨울에 땔나무를 하러 가면 바닥의 솔잎까지 다 긁어 가버린 인간들의 처사를 나무라기는커녕 어른이 철없는 아이를 받아들이듯 조용히 포근하게 맞아 주었다.

숲 속의 남모르는 무덤 가는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다. 무덤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으면 바닷바람과 하늘 그리고 아득히 높은 곳의 솔잎이 합주하는 음악이 우리들의 가슴과 꿈을 넉넉한 마음으로 적셔 주었다. 해가 설핏해지는 겨울 석양 무렵이면 더욱 애잔하게 다가왔다.

그 숲은 이제 도시 개발로 초라해졌고 마주 보이던 바다도 매립돼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는 통에 멀리 물러났다. 그곳에서 가꾸었던 어린 날의 꿈도 지워져 버렸다.

그러나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그 시절 그 숲의 꿈을 뒤적인다. 솔바람 소리, 숲으로 가는 고갯길, 저수지의 한 모퉁이처럼 조용하고 잔잔하던 바다와 갈대밭, 가끔 따라 와서 우리들 못지 않게 신이 나 숲 속을 뛰어 다니던 개의 눈동자와 표정까지 되새기다 보면 어느 새 잠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때때로 상상과 꿈속에서 옛날의 숲을 찾아 헤매며 밤을 보내는 내가 안면도 솔숲을 찾아가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숲의 아름다움이나 은혜를 입에 함부로 올리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것이다. 나무와 숲의 아름다움을 많은 시인들이 이미 노래했기 때문이다.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가 또 있을까( 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 / A poem lovely as a tree.)- 중간 생략- 시는 나 같은 바보나 짓는 것. 하느님은 나무를 짓는다.(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그 중에서도 나무를 하느님이 쓴 시라고 이처럼 노래한 조이스 킬머의 '나무'보다 더 절실하게 예찬한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우리 같은 범인들이 쉽사리 숲의 아름다움을 입에 올리겠는가. 조용히 마음과 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숲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산사태로 약 50명이 사망하고, 약 30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다. 비가 오면 빗물은 대부분 하류로 흘러가지만 일부는 땅속으로 스며든다. 땅속으로 들어간 빗물은 흙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르게 되는데, 땅속의 어디에선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머무른다. 고인 물은 그 부분 흙의 강도(마찰력)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흙이 물에 뜬 배처럼 비탈면 아래로 미끄러져 산사태가 일어난다.

튼튼하고 좋은 숲에서는 나무 뿌리가 흙을 고정시키므로 이 같은 산사태를 효과적으로 예방한다. 그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도 다 알다시피 산림은 비가 많이 내릴 때 홍수를 줄여 주고, 헐벗은 산보다 25배나 더 많은 물을 머금고 있다가 비가 내리지 않을 때 맑고 깨끗한 물을 서서히 흘려 보내 주는 거대한 자연 댐이다.

숲 못지 않게 가뭄과 홍수를 조절해 주는 논을 근년에 들어와 무참히 파괴하면서 물난리와 극심한 가뭄을 툭하면 겪는 실정이다. 숲과 녹지도 개발의 발톱 아래 차츰 줄어드는 형편이니 답답할 노릇이다.

숲의 심리적 효과도 대단하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는 주민들은 숲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보다 더 우호적이고 서로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사를 굳이 대지 않더라도 숲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넉넉하게 해주는지 대부분 경험과 느낌으로 알 것이다.

또 숲을 보면 선진국인지 후진국인지 알 수 있다. 일본 미국 독일 등 선진국들의 숲은 벌인 입을 다물기 힘들 정도로 웅장하고 대단하다. 전 국토가 공원이나 다름없는 일본을 보면 그들의 저력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지난 2백년간 국토녹화사업을 벌여오고 있는 독일 또한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연과 숲을 만들어 냈다. 그런 독일인들도 2차대전 패망으로 처참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그처럼 가혹한 조건에서도 그들은 숲을 가꾸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숲이 삶의 기본 바탕이라는 것을 국민 모두가 절실히 자각했기 때문이다.

미국도 자연과 숲을 지키고 가꾸는 것을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그 밖의 선진국들도 숲을 지키고 가꾸는 데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반면 후진국들은 숲을 예사로 훼손하고 마침내는 자신들을 재앙으로 몰아 넣는다.

선진국 후진국을 구분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것은 숲의 양과 질이다. 그걸 보고 판단하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40, 50년 전에는 완전 벌거숭이 산천이었다. 그러나 꾸준히 녹화사업을 한 결과 이제는 전 국토가 푸르게 되었다. 한번 황폐해진 국토를 숲으로 회복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양과 질에서 미흡한 면이 많고 특히 국민들의 인식이 선진국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 숲과 나무에 대한 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높은 차원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동화기업' 사보 5.6월호(20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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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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